이스라엘 백성을 향한 예언자들의 외침을 가장 잘 집약하는 개념은 회개일 것입니다. ‘새 마음을 갖다,’ ‘과거를 후회하다’도 같은 맥락에 속하지만,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 외에 달리 길이 없다는 사실을 ‘돌아서다, 돌아가다’ 만큼 명확히 보여주기는 어렵습니다. ‘돌아서다,’ ‘돌아가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슈브’가 회개의 대명사가 된 이유입니다. 우리가 목적지를 향해 출발하고 보니 지하철을 반대편으로 탔다면, 자신의 방향감각을 한탄하거나 SNS 메시지에 주의력이 떨어진 것을 질책하기 전에 즉시 다음 역에 내려서 반대 방향 열차를 타는 것이 순리일 것입니다. 회개는 자신이 잘못된 방향으로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방향을 전환하는 행동입니다. 언약 백성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종교 생활’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탐구하고 가능한 옵션들을 가늠해 볼 처지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고 있거나, 그렇지 않다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지고 있었을 뿐이니까요.
선지자의 질책은 지도층을 거쳐 백성 전체를 향한 회개의 촉구로 이어집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종교생활’에 몰입해 있었지만, 그 열심히 오히려 그들이 엉뚱한 곳을 향해 달려가고 있다는 사실을 가려주고 있었습니다. “너희는 벧엘에 가서 범죄하며 길갈에 가서 죄를 더하며 아침마다 너희 희생을, 삼일마다 너희 십일조를 드리며 누룩 넣은 것을 불살라 수은제로 드리며 낙헌제를 소리내어 선포하려무나 이스라엘 자손들아 이것이 너희가 기뻐하는 바니라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암 4:4-5).” 벧엘과 길갈은 이스라엘이 소중히 여기는 ‘성지’였습니다. 그런데 바로 그곳에서 그들은 죄를 더하고 있었다는 충격적인 말씀입니다! 교정시설은 죄를 지은 이들이 들어가 사회에 기여하는 존재로 ‘교화’되기 위한 시설입니다. 그러나 초짜 범죄자들이 교도소에서 ‘선배’ 범죄자들에게 배워 이전보다 나쁜 사람이 되어 나오기도 합니다. 우리는 신앙공동체가 본질을 잃고 세속화되면 죄인을 천국으로 인도하기는커녕 천국문을 막아서는 존재가 될 수 있다는 무서운 사실에 두려움을 느껴야 합니다.
아모스의 메시지를 듣던 이스라엘 백성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가뭄이 들어 양식이 떨어지고 먹거리가 없어 ‘이가 깨끗한’ 지경이 되어도 그들은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너희의 각 처소에서 양식이 떨어지게 하였으나 너희가 내게로 돌아오지 아니하였느니라(6절).” 추수에 꼭 필요한 비를 멈추어 곤경에 빠뜨려도, 곡식이 말라버리고 벌레들이 들이닥쳐 농산물을 먹어치우게 하셔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9절). 전염병과 전쟁과 소년병들의 희생도, 소돔과 고모라에 비교하고 ‘불붙는 가운데서 빼낸 나무조각’에 비유하실 정도로 그들을 처참하게 다루셔도 그들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10-11절). 드디어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 지나고 심판이 선언됩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내가 이와 같이 네게 행하리라 내가 이것을 네게 행하리니 이스라엘아 네 하나님 만나기를 준비하라(12절).” 이 ‘만남’이 어떤 만남일지는 자명합니다. 마음이 자고하고 완고해졌던 그들은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심판의 불 앞에서 깨달았을 때에는 너무 늦어 버릴 것입니다.
우리도 살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고와 성령의 견책을 오래도록 무시하면 마음이 완고해지고 마음의 귀가 닫힐 수 있습니다. 완고해진 마음을 오래 버려두면 정말로 너무 늦어질 수 있기에, 크고 두려운 하나님의 음성 앞에 우리 마음을 열어야 합니다. 더 늦기 전에 말입니다. “형제들아 너희는 삼가 혹 너희 중에 누가 믿지 아니하는 악한 마음을 품고 살아 계신 하나님에게서 떨어질까 조심할 것이요 오직 오늘이라 일컫는 동안에 매일 피차 권면하여 너희 중에 누구든지 죄의 유혹으로 완고하게 되지 않도록 하라(히 3:12-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