군인의 길을 동경해왔던 나는 대학생활 중 ROTC에 합격했고 군선교에 대한 소망을 품게 됐다. 그렇게 열심을 다해 대학생활과 신앙생활을 하던 중 갑자기 이유를 알 수 없는 찢어질 듯한 가슴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병원에 갈 생각도 없이 주님께 매달리며 기도에 전념했다. “주님, 이 통증만 사라지게 해주신다면 주님을 위하여 제 삶을 드리겠습니다.” 아픈 사람들이 통상적으로 하는 기도였지만 전심으로 부르짖으며 주님을 의지했다. 기도의 응답으로 통증은 깨끗하게 사라졌다. 지금도 X-Ray 촬영을 하면 그 흔적이 가슴에 남아있다. 이 흔적을 볼 때마다 그때 기도했던 마음과 하나님의 응답을 되새기곤 한다.
대학 졸업과 동시에 ROTC 장교로 군에 입대하게 됐다. 입대 전 다니던 교회에서 드린 파송예배 시간, 성도님들 앞에서 “저는 군에 장교로 입대하지만 군선교사로 파송받아 선교사 역할을 감당하겠습니다”하고 인사를 드렸다.
자칭 군선교사의 소원을 이뤄주신 것일까. 첫 부임지는 전남 신안군의 작은 섬이었다. 50대가 가장 젊은 축에 속했고 자동차도 없었으며 구멍가게 두 곳이 전부인 섬. 그마저도 군인들이 팔아주지 않으면 제품 유통기한을 대부분 넘기는 열악한 환경이었다. 작은 교회 하나가 있었지만 이단으로 알려져 군인들은 한 달에 한 번 대대 군종병이 섬에 올 때만 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섬에서 해안경계근무를 마치고 주둔지에 온 지 한달도 안 되어 대대장께서 “2소대장! 다음 주부터 성가대 지휘해봐!”라는 지시를 주셨다. 성가대와 찬양단은 두루 거쳤지만 지휘 경험은 없었다. 연대장과 대대장이 계시는 교회에의 지휘라 얼마나 떨렸는지 모른다. 7명의 신우 형제들을 모아 허공에 박자를 그려가며 연습했던 순간은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그렇게 신고식을 마친 앳된 청년의 군 선교는 성가대와 찬양의 길로 지경을 넓히기 시작했다. 교제 중이던 지금의 아내가 성가대 가운을 보내줬고, 본격적으로 시작된 교회 성가대에 군인 가족분들까지 참여해 예배를 섬기게 됐다.
전방에서 중대장으로 재직하던 시절에는 대대교회에서도 성가대를 조직해 섬겼고 나중에는 사단교회 성가대 지휘를 맡게 됐다. 이때부터 신우회라는 조직이 생겨 용사들의 신앙을 지도하고 섬기는 신우회 담당교사도 하게 됐다.
신우회 용사들의 신앙지도를 하며 간부와 군인 가족이 한 그룹이 되어 섬김이 역할을 맡았다. 대부분 집에서 간식거리를 준비해와서 예배 후 소그룹을 지도하는 형태였다. 지금이야 다양한 간식들이 있지만 당시에는 직접 만든 떡볶이, 순대, 어묵 등이 배고픈 신우 형제들을 배를 채워주는 주된 간식이었다. 소박했지만 작은 것에도 감사와 고마움이 넘치던 그 시절은 참으로 행복했다.
소령 때는 아내와 함께 1군 사령부 영내 신우회를 섬기며 군에서 정말 신실한 신앙의 동역자를 많이 알게 됐다. 그분들은 평신도였지만 목회자에 버금가는 역할을 감당하셨다. 교회와 부대에서의 삶의 모습은 그대로 따라서 배우고 싶을 정도로 존경스러운 분들이셨다. 그분들 덕분에 군 선교에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됐고 한 영혼의 소중함을 깨닫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