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 신학에서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지지하는 신학자들의 명단을 소개하는 것은 어느 정도까지 이 삼위일체론이 각광을 받고 있는지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자 중에서 가장 중요한 사람은 아마도 위르겐 몰트만(Jürgen Moltmann)과 볼프하르트 판넨베르크(Wolfhart Pannenberg)일 것이다. 그 외에 콜린 건톤(Colin Gunton)과 칼빈 신학교 학장을 지낸 코넬리우스 플란팅가(Cornelius Plantinga, Jr.), 프린스턴 신학교의 다니엘 밀리오리(Daniel Migliore), 테드 피터스(Ted Peters), 리챠드 스윈번(Richard Swinburne), 해방신학자 레오나르도 보프(Leonardo Boff) 신부, 그리고 동방 신학자 존 지즐라스(John Zizioulas) 등이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주창자들이다.
흥미로운 것은 함석헌과 김교신 등에게 영향을 미친 일본의 무교회주의자 우찌무라 간조(內村鑑三, 1861~1930)도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자신이 신종하는 삼위일체론으로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우찌무라 간조가 현대 신학에서 토론되고 있는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지지자임도 놀랍고 그가 조나단 에드워즈(Jonathan Edwards, 1703~1758)를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로 지목하고 있음 또한 우리의 관심을 끌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다.
우찌무라 간조는 『기독교문답』에서 “그러면 그 때에 하나님은 누구를 벗으로 삼으셨다고 말씀하시는 것입니까?”라고 묻고 “그의 가운데 삼위가 있어 그는 그 자신 중에 거룩한 사회를 갖췄다고 하는 것입니다. 「삼위의 사회」(the Society of the Trinity)란 미국 최고의 신학자 죠나단 에드워즈가 처음 쓴 숙어로서 「사회」라는 말을 누구나 입 밖에 내는 오늘에 이르러서는 심히 속화되기 쉬운 단어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이것을 잘 사용하면 그 가운데 깊은 진리를 포함하는 말이라 생각합니다”라고 답하고 있다(『우찌무라 간조 전집 1권』, 471). 이어지는 내용 가운데 우찌무라 간조는 “나는 완고한 신자 가운데 한 사람으로서 외국선교단체의 밥은 먹지 않지만 그러나 삼위일체의 교리를 믿음과 동시에 또 예정의 교리도 믿습니다”(501f)라고 말하고 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삼위일체론은 여러 면에서 칼빈과 현대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을 이어 줄 수 있는 징검다리로 여겨진다. 칼빈과 마찬가지로 에드워즈도 성령론과 관련한 필리오케(filioque) 논쟁에 있어서는 서방 교회의 입장을 지지하고 있다. 하지만 칼빈과 달리 에드워즈는 삼위일체를 설명함에 있어 분명하게 사회적 유비를 도입하고 있다. 칼빈이 심리적 유비를 거부했다면 에드워즈는 심리적 유비 자체를 거부하지는 않지만 사회적 유비를 강화 내지는 보완하는 것으로 사용하고 있다.(이상현, 『삼위일체, 은혜 그리고 믿음』, 40).
현대의 삼위일체론자들에 따르면 서방 교회의 심리적 삼위일체론은 성경이 증언하는 하나님 안의 삼위성 혹은 복수성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하고 있으며 또한 너무 철학적이며 사변적이어서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구원 사역과 관계 맺기 어렵다. 따라서 이들은 하나님의 삼위성을 먼저 강조했던 동방 교회 전통을 더 중요시하여 그것에서 배우고자 하며 때로는 그 전통을 철저히 재해석해서 더욱 본격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을 형성하려고 한다. 곧 오늘날의 본격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은 하나님을 서로 완전히 독립되고 구별되는 성부, 성자, 성령의 세 인격이 이루는 공동체(community) 내지 사회(society)로 이해하며 이들 사이의 일치 내지 연합을 성부가 아닌 세 신적 위격 사이의 상호점유 또는 통교적 연합(perichoreticunion)에서 찾는다 (박만, 『현대 삼위일체론 연구』, 35).
그러면 우리는 이러한 현대 신학에서의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영향력 증대를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가? 긍정적으로 볼 때 본격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의 성장은 우리들로 하여금 좀 더 균형 잡힌 형태로 하나님의 신비를 이해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강점에도 불구하고 본격적인 사회적 삼위일체론은 삼위 사이의 일치 내지 하나됨, 곧 통일성을 설명하는데 있어 여전히 약점이 있다. 오히려 그것은 심리적 삼위일체론과 상호 보완적으로 사용될 때 하나님의 신비를 잘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될 수 있을 것이다.
사회적 삼위일체론자들은 삼위일체를 인간 사회의 모델로 생각하여 교회론에 적용하기도 하고 인간의 사회 일반에도 적용하려고 시도하고 있다. 하지만 이런 시도에 대한 반론 또한 만만치 않다. “삼위일체를 인간 사회의 모델이 될 수 있는 어떤 사회로 이해하는 것은… 사실상 삼위일체 교리가 강조해야 할 하나님의 타자성에 대한 우리의 이해를 둔화시킨다”(리처드 버캠, 『몰트만의 신학』, 2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