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리 채플린 감독의 영화 ‘살인광 시대’는 비록 흥행에서는 실패했어도 그 어떤 영화보다 논란이 많았다. 내용으로는 제국주의 혹은 국가지상주의 혹은 배타적인 애국주의의 폭력 정치를 고발하고 있다. 그러나 미국의 매카시즘(McCarthyism)에 의해 채플린을 공산주의자 혹은 무정부주의자로 오인하게 만든 작품이기도 하다.
그동안 평화주의자이며 인도주의자 캐릭터로 각인되어 있었던 채플린이 연쇄 살인범이라는 상반된 연기를 한다는 점 때문에 영화는 처음부터 관객들의 의아심을 불러일으켰을 뿐만 아니라 갖가지 정치적인 논란에 휩싸였다. 그 바람에 미국에서는 흥행에서 성공하지 못했다. 캐릭터의 변신에 대한 비난에 채플린은 분명한 입장을 표명했다. 다시 말해 영화가 제작된 시기는 이미 경제적인 불황기를 벗어난 때라 더 이상 방랑자 캐릭터는 어울리지 않음을 강조했다.
‘살인광 시대’는 프랑스에서 부유한 과부들을 유혹한 뒤에 우연한 죽음을 가장하고 유산을 가로채는 방식으로 살인 행각을 일삼았던 실제 범인 앙리 랑드뤼를 모델로 한다. 그는 죽은 여성의 친척 중에 한 명에게 발각되어 결국 사형을 당했다. 큰 틀에서 보면 실제와 다르지 않은 결론으로 영화는 끝난다. 그러나 채플린은 단순한 연쇄 살인범의 범죄 이야기를 재현하는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오히려 국가 이익을 최고로 여기며 개인의 자유를 빼앗을 뿐만 아니라 희생을 강요하고 또한 다른 나라를 침략하는 전체주의에 따른 살인과 가족주의에 따른 살인을 대조시키면서 특유의 코미디적인 특성을 가미해 블랙 코미디로 만들었다. 소재에 대한 과감한 변형을 시도한 점에서 그의 창의적인 능력을 엿볼 수 있다. 채플린은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시국과 관련해 자신의 소신을 담은 말을 전한다. 그 내용은 개인의 살해행위와 국가의 살해행위는 단지 숫자에 차이가 있을 뿐,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것이다. 다수를 죽이면 영웅이 되고, 소수가 되면 단순한 살인범이 된다는 말이다.
채플린의 비판적인 시각은 교회 중심주의에도 유효하게 적용된다. 한국교회는 많은 경우 교회를 우선으로 생각하는 것을 신앙으로 생각하도록 했다. 처음 북미로 이주해서 무엇보다 교회를 먼저 세웠고 또 그것을 중심으로 마을을 세운 청교도 신앙을 본받는 것으로 배웠다. 교회를 위해선 개인의 자유와 가족의 희생까지도 불사하게 했다. 좋게 생각한다면 한편으로 하나님을 우선으로 여기는 신본주의 신앙을 확산할 수 있었고, 수많은 교회를 세우는 결과로 나타났다. 반면 교회 중심주의는 교권만을 우선으로 생각하게 했고, 이것은 목회자를 우선하는 신앙으로 변질됐다. 자본주의에 물든 교회는 눈에 보이는 양적인 성과를 중시했고, 그 결과 교회가 인구가 많은 도시에 집중하게 됐다. 이러한 열매로 대형교회가 나타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하나님은 결코 국가만을 통해 당신의 뜻을 계시하시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교회만을 통해 자신을 드러내시지도 않는다. 하나님은 개인을 소중히 여기시며, 개인을 통해서도 당신의 뜻을 분명히 드러내신다. 이것이 개신교의 프로테스탄티즘 원리이다. 이기적이고 무절제한 개인주의도 잘못이지만, 무분별한 국가주의나 전체주의 그리고 교회주의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개인과 국가, 개인과 교회 사이의 균형은 깨지지 않아야 한다. ‘살인광 시대’는 블랙 코미디로서 당시의 폭력 정치 행태를 풍자하는 영화이지만, 오늘의 관점에서 보아도 결코 시대에 뒤지지 않으며, 오히려 현실을 비판적으로 돌아보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