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공이 아니라 섬김으로”, 약자들을 끝까지 품어낸 선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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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공이 아니라 섬김으로”, 약자들을 끝까지 품어낸 선교사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8.21 16:2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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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기독교 140주년 기념 ‘선교사 열전’ ⑲ 빈민의 어머니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 서서평 선교사

서서평((徐徐平). 어쩌면 조선의 평범한 사람의 인물처럼 들리는 이 이름의 주인공은 독일 태생의 미국인 엘리자베스 요한나 쉐핑(Elisabeth Johanna Shepping, 1880~1934년) 선교사다. 본인이 작명한 우리식 이름으로, 천천히 한다는 한자 ‘서’와 평평할 ‘평’을 써서 자신의 급하고 모난 성격을 대신하고자 했다. 거친 성격을 생각할 수 있지만 서서평은 굶주리고 소외되고 갈 곳 없는 사람들을 한없는 품어낸 누구보다 어머니였다. 

주로 광주에서 사역하며 일생을 헌신하다 이 땅에서 주님 품에 안긴 서서평을 아는 신앙인들은 많지 않다. 지난 2017년 CGNTV가 책과 영화로 제작한 ‘서서평, 천천히 평온하게’가 입소문을 타면서 이례적으로 흥행을 이끌기도 했지만 여전히 작은 예수로 살았던 서서평의 이름은 생소하다. 누군가는 서서평을 한국의 마더 테레사라고 부르지만, 마더 테레사를 인도의 서서평으로 부르는 것이 맞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하나님 아버지를 만나다
미국 남장로교 선교부로부터 간호선교사로 파송을 받았지만, 서서평은 독일 남부 비스바덴지역의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났다. 철없는 남녀가 사고(?)로 낳은 딸이었다. 한 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까지 미국으로 홀로 떠나버리면서 외할머니 손에서 외롭게 자란다.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떠나자 9살의 작은 소녀는 홀로 어머니를 찾아 떠난다. 다행히 미국에서 어머니를 만나 재회했고 19살 때까지 뉴욕에서 가톨릭계 고등학교를 다녔다. 이후 2년 동안 성마가병원 간호학교를 다닌후 정식 간호사의 길을 걷게 된다. 

간호사로 뉴욕시립병원에서 일하던 중 서서평은 주님을 만나게 된다. 동료 간호사의 전도를 받아 예배에 참석한 후 복음주의 신앙으로 귀의했다. 하지만 가톨릭 신앙을 내려놓은 딸을 어머니는 이해하지 못한다. 집에서 쫓겨날 정도로 어머니는 완강했지만, 오히려 서서평의 믿음은 더 굳건해졌다. 

뉴욕 유대인결핵요양소 이태리 이민자수용소에서 헌신적으로 약자들을 돌보면서, 무려 8년 동안 성서교사훈련학교에서 공부하고 졸업했다. 어린 시절부터 굴곡진 삶을 살았던 서서평은 아버지와 어머니에게서 받지 못했던 사랑을, 하나님 아버지에게서 발견한 것 같다.

주님을 만난 서서평은 성서학교를 졸업한 후 1912년 간호선교사를 모집한다는 소식을 듣고 간호선교사로 헌신한다. 조선에서는 사람들이 제대로 치료받지 못해 길거리에 버려질 정도라는 말에 뜻을 굳힌 것이다. 

1912년 2월 20일 조선에 도착한 서서평의 당시 나이는 32세로 적지 않은 편이었지만, 누구보다 헌신적으로 조선의 약자들을 위해 살아갔다. 

조선에서 22년 동안 독신으로 살면서, 가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을 품어내며 어머니로 살아간 서서평 선교사는 마지막까지 자신의 시신을 기부하며 섬김을 실천했다. 

최초의 여성신학교 ‘이일학교’
서서평은 서울 세브란스병원, 군산 구암예수병원에서 근무한 적이 있긴 하지만, 대부분 전라도 광주를 기반으로 사역했다. 간호사를 양성하고 복음을 전파하는 본연의 사역에 충실한 그는 광주 제중원를 중심으로 미혼모, 고아, 한센인, 노숙인과 같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치료에 매진했다. 자신 역시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냈던 터라 더욱 안타까운 마음으로 환자들을 돌봤지 않을까. 1919년 3.1운동 당시에는 수감 중인 독립운동가들을 돌봤다는 이유로 일제로부터 활동 금지 조치를 당한 적도 있다.

서서평은 조선말을 잘하고 문화에 대한 감각도 뛰어났기 때문에 성경 교사로 여인들과 어린 아이를 가르치는 사역을 수월하게 감당했다. 한 달 이상 말을 타고 각처 순회 진료와 전도 여행을 다녀오는 경우도 많았다. 

그렇게 순회하는 과정에서 마주하게 된 것이 조선 여인들의 삶이었다. 이 땅을 찾아온 대부분 선교사들이 그렇듯 서서평의 눈에도 조선 여인들의 비참한 현실이 먼저 들어왔다. 여성들을 위한 교육에 앞장섰고, 스스로 자기 권리를 발견할 수 있도록 성경과 한글을 가르쳤다. 

1920년에는 가난 탓에 공부할 시기를 놓친 조선 여인들을 위해 학교를 시작했고, 1922년 광주 제중병원을 기반으로 간호사 양성교육도 전개한다. 자신의 작은 침실에서 시작한 학교는 광주 양림동 동산에 붉은 벽돌 3층짜리 건물을 짓게 된다. 

조선 최초의 여자신학교 ‘이일학교’이다. 이일학교는 현재 한일장신대학교 전신으로, 서서평은 미국인 친구 로이스 니일(Lois Neel)의 후원을 받아 건물을 지었다. 니일의 한국식 이름이 바로 ‘이일(李一)’이다. 여학생들이 천으로 공예품을 만들면 미국으로 수출해 여학생들의 학비를 마련하기도 했다.

이일학교는 1941년 신사참배를 반대해 폐교됐다가 1948년 구애라 선교사에 의해 복교됐고, 1961년 전주 한일여자신학대학에 합병되는 역사로 이어졌다.

한편, 서서평은 1922년 여전도회전국연합회의 전신이라고 할 수 있는 ‘부인조력회’를 만들어 여성 지도자를 길러내고자 했고, 노방전도라고 할 수 있는 ‘확장 주일학교운동’을 추진해 같은 해 주일학교연합회 창립에 영향을 미쳤다. 

하루 10전으로 버티다 영양실조
서서평은 철저하게 검소하게 생활하며 조선 사람처럼 살았다. 조선 여인들처럼 무명 베옷을 입었고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일생 동안 보리밥에 된장국을 먹을 정도로 자신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절제했다. 

서서평의 책상에는 ‘성공이 아니라 섬김’(Not Success But Service)이라는 글귀가 늘 붙여져 있었다. 조선에서 그의 삶이 어떠했을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좌우명이다. 서서평은 고아와 빈자, 특히 한센인들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자신의 집에 같이 머물던 과부만도 38명, 자녀로 입양한 아이만도 14명이나 됐다. 일생 결혼하지 않은 채 버림받은 사람들을 어머니로서 품어냈다. 서서평은 소화기계 풍토병의 일종인 스푸르 감염으로 평생으로 고생해야 했다. 그의 사망에도 스푸르가 영향을 주었다고 하는데, 중요한 사인은 영양실조였다. 영양실조에 걸릴 정도로 자신의 생활환경은 초라했지만, 과부와 고아들의 생활비는 넉넉하게 감당했다. 

서서평은 사망하기 한 해 전 한센인 환자들을 포함해 목회자 등 50여명과 함께 조선 총독부를 향해 나아가는 시가행진을 벌이기도 했다. 한센인들을 거세 등으로 멸족시키려는 정책을 펴고 있는 총독부를 향해 벌인 저항이 알려지자 전국에서 한센인들이 동참했다. 총독부는 결국 한센인 정책을 변경하고 소록도 등지에 한센인들이 살아갈 수 있도록 했다. 

흥미로운 점은 한국교회가 오랫동안 지켜온 ‘성미제도’가 서서평에게서 시작됐다는 사실이다. 성도들이 가져온 성미 ‘쌀’로 가난한 사람들을 도왔고, 조선예수교장로회가 이를 공식 제도로 채택한 것이다. 

서서평은 다른 선교사들이 3원으로 하루 끼니를 해결할 때, 10전으로 버텼다고 한다. 그렇게 돈을 모아 가난한 사람을 돌보고, 제주도 선교비까지 보냈다. 독신으로 살았던 서서평은 영양실조에 걸릴 수밖에 없었다. 

1934년 6월 22일 새벽 서서평은 22년 사역을 마감하고 주님 품에 안겼다. 시신마저 의료용으로 기부한 채 남긴 재산은 누군가에 나눠주고 남은 담요 반장, 쌀 두 홉, 현금 27전이 전부였다. 1934년 7월 7일 광주 최초의 시민사회장으로 치러진 장례식에서는 “어머니 어머니”를 부르는 통곡소리로 가득했다. 서서평 선교사는 현재 광주 양림동 호남신학대학교 뒷편 선교사 묘역 끝자리에 안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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