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교의 피로 심은 복음의 씨앗, 뿌리깊은 나무로 자라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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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교의 피로 심은 복음의 씨앗, 뿌리깊은 나무로 자라났다
  • 목포=이인창 기자
  • 승인 2024.07.24 1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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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도의 땅, 순교 발자취 따라(하)

섬 선교의 어머니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탐방
최초 지역교회 ‘목포양동교회’, 고아 품어낸 ‘공생원’

영광 야월교회와 염산교회에서 가슴 아팠던 순교 역사를 되짚어본 후 전남 신안군 증도에 자리한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으로 향했다. 2019년 완공된 칠산대교와 2010년 완공된 증도대교 덕분에 1시간이 채 걸리지 않았다. 

1004개 섬으로 유명한 신안군에 연륙교가 완공됐다는 뉴스를 종종 듣긴 했지만, 이 정도일 줄 몰랐다. 초등학교 입학 전 임자도에 잠시 살았던 때를 생각하면 배를 타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이 신기할 따름이다.

잘 가꾸어진 정원 위편에 보이는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저렴한 비용으로 이용할 수 있는 숙소와 식당까지 갖추고 있어서 휴가철에 가족과 함께 탐방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도 든다. 

기념관에서는 선교사 자녀들을 위한 캠프가 한창 진행 중이었다. 부모를 따라 험한 선교지에서, 어쩌면 생명의 위협을 무릅써야 할 정도로 위험한 곳에서 지냈을 아이들. 선교사 자녀들의 티 없이 밝은 표정을 보고 애잔함을 느끼는 건 애정 때문이리라. 

기념관이 위치한 증도는 섬 주민의 90%가 기독교인일 정도로 복음화율이 높다. 그 뿌리가 바로 문준경 전도사이다. 문 전도사를 소개하는 영상을 잠시 시청한 후 전시관으로 이동해 그의 발자취를 자세히 따라가 볼 수 있었다. 

문 전도사는 17세 나이에 시집을 갔지만 10년이 넘도록 아이가 생기지 않았다. 남편이 자녀 출생을 위해 두 번째 부인을 맞이하면서 문 전도사는 홀로 목포에서 생활하게 되었고, 그곳에서 처음 복음을 들었다. 처음 출석한 북교동교회에는 유명한 부흥사였던 이성봉 목사가 시무하고 있었고 문 전도사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
문 전도사는 1931년 마흔 살 나이에 상경해 경성성서학원에 입학했고, 재학 중 무려 6년 동안 신안군 도서지방을 순회하면서 전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한국대학생선교회(CCC) 설립자 김준곤 목사, 중앙성결교회 이만신 목사 등 한국교회를 이끌었던 걸출한 인물이 그의 제자이다. 

기념관의 이름에서 알 수 있듯 문 전도사는 1950년 전쟁 중 순교했다. 문 전도사는 인민군에 의해 목포에 수감됐지만, 인천상륙작전을 계기로 석방될 수 있었다. 하지만 증도에 남은 성도들이 잔당들에 의해 죽을 것을 걱정한 나머지 주변의 만류를 뿌리치고 섬으로 들어갔다. 안타깝게도 20여명 성도들과 함께 백사장에서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문준경 전도사 순교기념관은 바로 이런 문 전도사의 삶의 애환과 전도 여정, 전도의 열매를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기념관 2층 한켠에는 ‘노둣길’을 걸어보는 체험도 할 수 있었다. 노둣길은 전라도 방언으로 징검다리로, 문 전도사 역시 섬과 섬 사이에 돌로 만든 노둣길을 따라 이동해야 했다. 자칫 바닷물에 휩쓸릴 위험천만한 순간도 많았을 테지만, 전도자는 한 번도 발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문 전도사는 무려 122개 섬을 직접 다니며 복음을 전했고, 그때 심긴 복음의 씨앗은 지금 풍성한 열매를 맺는 뿌리 깊은 나무가 됐다. 기념관에서 조금 떨어진 순교터는 다음에 둘러보기로 하고 발걸음을 돌렸다.

문준경 전도사는 100개가 넘는 신안군 섬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6.15 전쟁 당시 자발적으로 교인들을 살리겠다고 증도에 들어갔다가 순교했다. 사진은 2013년 개관한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문준경 전도사는 100개가 넘는 신안군 섬을 순회하며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했다. 6.15 전쟁 당시 자발적으로 교인들을 살리겠다고 증도에 들어갔다가 순교했다. 사진은 2013년 개관한 문준경전도사 순교기념관.

“복음의 씨가 뿌려진 처음 터”
신안군 증도에서 목포까지도 차로 한 시간 남짓 이동했다. 한국교회총연합 답사단으로 함께한 일행은 목포 하당신도시 숙소에 여장을 푼 후 구도심 속 기독교 유적지 목포양동교회와 공생원으로 향할 준비를 했다. 

아침식사 후 도착한 곳은 옛 정취가 묻어나는 구도심이다. 가까운 곳에 보이는 목포의 상징 유달산에는 케이블카가 부지런히 오가고 있다. 목포양동교회는 2차선 도로에서 내려 몇 걸음만 걸으면 됐다. 예배당 앞에는 여러 개의 기념비와 기념패들이 눈에 띈다. 문화재청이 지정한 ‘대한민국 근대문화유산 제114호’, ‘3.1운동 만세시위지’, 일제를 비판하다 투옥 중 사망한 ‘박연세 목사 순교비’, ‘한국기독교장로회 기념패’가 보이고, 조금 떨어진 곳에는 1987년 선교 100주년을 기념해 부활절예배 헌금으로 건립한 선교기념비도 있다. 기념비에는 “이곳은 목포에 복음의 씨가 뿌려진 맨 처음 터”라는  힘 있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140년 전 조선 사역을 시작한 장로교 선교사들은 파송 교단은 달랐지만, 경쟁보다는 화합을 선택했다. 한반도 선교지를 나누고 호남지역은 미 남장로교에서 맡도록 했다. 남장로교는 먼저 전주지부와 선교지부를 개척했고, 유진 벨 선교사를 파송해 개항도시 목포에 지부를 열도록 했다. 그렇게 유진 벨 선교사에 의해 전남지역 최초의 교회, 양동교회가 1897년 3월 5일 설립됐다. 지금은 사라졌지만 최초의 근대식병원 프렌치병원, 여전히 든든히 서있는 미션스쿨 영흥학교와 정명학교도 이곳에서 시작됐다.

먼저 순례했던 영광 야월교회를 개척한 유진 벨 선교사는 이곳에서 기도로 준비하고 출발했겠다는 생각도 하게 된다. 교회는 1910년 3번째 증축을 해야 할 정도로 부흥했다. 예배당 건축은 성도들이 직접 헌금해 완공했다. 앞마당에서 예배당으로 들어가는 입구가 흥미롭다. 돌계단을 따라 정면으로 들어가는 문이 있고, 측면에 2개의 문이 더 있다. 원래 정면에 문이 하나 더 있었지만, 종탑을 세우면서 폐쇄했다고 한다. 측면 2개의 문은 당대 다른 교회들처럼 남녀 성도들이 각각 이용할 수 있도록 만들었다. 

남성이 출입하던 건물 왼쪽의 문 상단에 ‘태극기’ 문양이 눈길을 끈다. 한자로 써 있는 ‘대한융희 4년’이 바로 3번째 증축을 했던 1910년이다. 여성들이 출입한 오른쪽 문 위에는 ‘주강생일천구백구십년’이라고 적혀 있다. 정면 문에는 십자가가 음각되어 있다. 예배당 아래에는 작은 역사 전시실도 마련되어 있다.  

교회 역사를 안내한 지정택 은퇴장로는 “양동교회는 500명이 넘으면 분립 개척을 하는 원칙으로 지금까지 7개 교회를 분립 개척했다. 과거 선교지 건축물 중 전국에서 유일하게 현재도 사용하는 교회”라면서도 “우리 교회는 역사를 자랑하느라 부흥하지 못했다. 현재의 우리 역사를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반성하기도 했다.

목포양동교회 석조 예배당
목포양동교회 석조 예배당

“목포가 울었다”
목포양동교회를 나와 거지대장 윤치호 전도사가 설립한 ‘공생원’으로 향했다. 윤 전도사는 목포양동교회 교역자로 시무하다 부모를 잃고 버려진 아이들을 품었다. 우리가 도착할 즈음 윤치호 전도사와 윤학자 여사의 아들 공생복지재단 윤기 이사장이 일본에서 막 도착해 맞아주었다. 공생원 맹현숙 원장과 직원들의 환대도 인상적이다.

1928년 19살에 불과했던 윤치호 전도사는 다리 밑에서 굶주림에 떨고 있는 고아 7명을 데려와 더불어 산다는 뜻의 공생원을 시작했다. 윤 전도사는 총독부 관리의 무남독녀 외동딸이자 목포양동교회가 설립한 정명여고 교사였던 다우치 치즈코를 만나 결혼했다. 기독교인이었던 윤 여사의 어머니가 믿음으로 결혼을 허락한 것이 큰 역할을 했다.

윤 전도사 부부의 헌신적인 돌봄에 전국에서 고아들이 열차를 타고 몰려들 정도였다고 한다. 맹현숙 원장은 “해방이 되어 일본인들은 고국으로 떠났지만, 윤학자 여사님은 끝까지 남으셨다. 자녀 4명도 고아들과 함께 먹이고 재우고 입히며 길러냈다. 한국전쟁 이후 폭발적으로 고아가 늘었음에도 혼자서 묵묵히 감당해 내셨다”고 설명했다. 안타깝게도 윤치호 전도사는 고아들을 위한 식량을 구하러 나갔다가 전쟁 중 행방불명되어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과거 아동숙사에 조성한 윤치호·윤학자 기념관에는 우리나라 여성 최초로 받은 대통령 훈장, 제1회 목포시민상을 비롯해 공훈 기록과 역사 사진들이 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공생원을 설립한 윤치호 전도사와 공생원 아이들.
공생원을 설립한 윤치호 전도사와 공생원 아이들.

윤기 이사장은 “이익보다 손해 보는 길을 선택하는 어머니를 이해하지 못했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윤 이사장은 아버지처럼 어머니처럼 삶을 살았다. 역시 헌신적인 일본인 아내와 결혼했고, 동경, 교토 등 5개 지역에서 함께 사회복지시설을 세워 약자를 돌봤다. 공생원은 공생원복지재단으로 발전해 현재 국내외 17개 사회복지시설에서 윤치호·윤학자 부부의 신앙과 박애정신을 잇고 있다.

목포시민들의 무한 사랑을 받던 윤학자 여사가 1968년 사망했을 때 장례식은 목포 최초의 시민장으로 치러졌다. “목포가 울었다”는 기사 제목이 나올 정도로 시민들이 연도에 나와 애도했다. 

탐방을 마치고 차에 탑승하고 떠날 때, 윤기 이사장과 맹 원장, 직원들이 끝까지 손을 흔들며 배웅해주었다. 잠깐 들른 나그네를 환대하는 그들의 모습 속에 윤치호·윤학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했다. 

윤치호·윤학자 부부의 아들 윤기 이사장이 일본인 아내와 함께 탐방객들을 배웅하고 있다.
윤치호·윤학자 부부의 아들 윤기 이사장이 일본인 아내와 함께 탐방객들을 배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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