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이 달라진다. 100년이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다. 기술의 발전과 인식의 변화, 문화의 확장은 정치·경제 전반은 물론 우리의 일상까지도 뒤바꿔놨다. 교회와 선교도 예외는 아니다. 약 2천년 전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전해졌던 복음은 마차와 범선, 기차와 비행기에 몸을 싣더니 이제는 전 세계에 연결된 인터넷망을 타고 단 몇초만에 전달된다.
달라진 세상에서 교회의 모습과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2천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국제 로잔운동은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현실과 그에 맞는 선교 전략을 고민한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The State of the Great Commission Report)’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의 선교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작성한 보고서는 10가지 질문을 통해 교회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그에 맞춘 대안을 제시한다. 본지는 이번 호부터 10회에 걸쳐 로잔운동이 고민한 10가지 질문의 포장을 풀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정의란 무엇인가?” 하버드 교수이자 정치 철학자인 마이클 센델이 던진 질문은 선풍적인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불티나게 팔려나간 책의 인기는 곧 ‘정의’에 대한 관심의 표상이다. 어쩌면 대중들은 스스로 몸담고 있는 한국 사회가 그다지 정의롭지 않다고 느꼈기에 정의(正義)에 대해 분명하게 정의(定義)해주기를 그토록 바라왔는지도 모른다.
최근 치러진 일련의 총선과 대선에서 가장 중요하게 다뤄진 키워드 역시 ‘공정’과 ‘정의’였다. 바를 정(正)을 공유하는 두 단어는 현실에서도 긴밀하게 연결된다. 특히 청년 세대들은 기회가 ‘공정’하게 주어지는 것을 곧 ‘정의’라고 여겼다. 부모가 물려준 자산이 없다면 계층 상승의 기회 역시 박탈당한 것이라 자조하는 청년들은 ‘공정’과 ‘정의’의 실현을 간절히 부르짖었다.
비단 한국 사회뿐일까. 세계로 시야를 넓히면 훨씬 더 처절한 불공정과 부정의가 만연하다. 기회의 불공정을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가장 기초적인 권리를 부당하게 잃어버린 이들도 있다. 어떤 이는 비만으로 인한 성인병을 고심할 때 지구 반대편에서는 당장 먹을 끼니를 걱정하는가 하면 또 어떤 이는 자유롭게 하나님을 예배할 자유조차 갖지 못한다. 이런 세계의 현실 앞에서 모든 사람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존귀하게 창조됐다 믿는 우리 크리스천은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은 무엇인가’(What is Fair and Just?) 되묻지 않을 수가 없다.
여전히 만연한 ‘불공정’의 파편
가장 원초적인 문제부터 들여다보자. 부의 불평등은 곧 빈곤으로 이어진다. 당장 주린 배를 채우는데 걱정이 앞서는 삶과 수많은 메뉴 중 무엇을 고를지 고민하는 삶은 동일선상에 있다고 말하기 힘들다.
그나마 안도할 만한 지표는 절대적 빈곤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점. 하루에 1.25달러 미만으로 생존해야 하는 ‘극심한 빈곤’ 속에 사는 사람들의 수는 1990년 20억명이 넘었지만 2019년엔 10억명 밑으로 줄어들었다. 같은 기간 세계 인구가 약 20억명 증가했음에도 빈곤 인구가 감소했다는 점은 의의가 적지 않다. 특히 아시아권은 급속한 경제성장에 힘입어 절대 빈곤이 가장 극적으로 감소한 지역으로 나타났다.
아이러니하게도 종교에 대한 박해는 증가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31년째 기독교 박해 지수를 발표하고 있는 오픈도어선교회의 ‘월드 와치 리스트’에서는 이러한 흐름을 관찰할 수 있다. 리스트에 따르면 1993년엔 40개국에서 기독교인들이 높은 수준의 박해를 받았다면, 2023년엔 동일한 수준의 박해를 받는 국가가 무려 76개국으로 약 2배 가까이 늘었다.
로잔운동은 종교에 대한 박해 증가의 이유를 남반구의 식민지 해방과 서구 사회의 세속화로 인한 기독교 지원 감소를 꼽는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아시아와 북아프리카에서 가장 극심한 것으로 보고되며 이슬람에 대한 박해는 인도, 중국, 미얀마에서 심하다. 힌두교와 불교에 대한 박해는 기독교와 무슬림에 비하면 나은 편이지만 최근 몇 년 사이 증가하고 있는 추세다.
성별에 따른 불평등은 여전하다. 세계은행이 올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발표한 보고서에 의하면 세계적으로 여성의 법률적 권리는 남성의 36% 수준에 불과한 것으로 나타났다. 법률에 여성의 권리를 온전히 보장할 장치를 갖춘 나라는 전체의 40%에도 미치지 못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다. ‘기독교가 자신에게 매우 중요하다’고 말하는 여성의 비율이 남성에 비해 15~20% 높은 반면, 교회의 중요한 직책들은 아직도 대부분 남성의 차지다.
날로 극심해지는 박해
박해의 역사는 교회의 역사와 궤를 같이한다. 기독교인이라는 말이 생겨난 이래로 무려 2천년이 넘게 지난 지금까지도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존속하고 있다. 게다가 최근에는 정부 차원에서 종교의 자유를 제한하는 법률과 정책의 발의가 늘어나는 분위기다.
오픈도어선교회의 월드 와치 리스트는 오늘날 3억6천만명이 넘는 기독교인들이 신앙으로 인해 높은 수준의 박해와 차별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교회에 대한 신뢰도가 하락하며 기독교인들이 곱지 않은 시선을 받고 있다고는 하지만 북아프리카와 중동 등지에서 벌어지는 기독교 박해는 일반적인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이다. 교회에 대한 공격, 예배당과 기독교인들의 자택에 대한 방화, 파괴, 약탈, 신체적 폭행, 납치, 강간, 살인 등을 비롯해 중앙권력을 통해 가해지는 체포, 투옥, 납치, 고문 등이 21세기에도 여전히 자행되고 있다.
박해가 심화됨에 따라 복음을 전하는 방법에 대한 재고도 요청된다. 억압적인 감시와 공격을 피하거나 극복할 수 있는 전달 방법의 개발이 절실하다. 만약 박해가 사회 전반의 분위기에 의한 것이라면 각 지역의 사회문화적 상황에 맞춰 자연스럽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방안도 연구돼야 한다.
기독교인에 대한 박해는 선교 활동 자체를 막기도 하지만 복음을 전할 수 있는 접점을 만들 기회도 줄인다는 점에서 치명적이다. 이를 돌파하기 위해 소셜 미디어와 사이버 공간을 활용하는 등 창의적이고 유연한 방법이 필요한 시점이다. 기독교 신앙 자체가 사실상 금지된 곳이라면 삶으로 그리스도의 성품과 가르침을 나타내는 것도 강력한 복음의 증거가 될 수 있다.
교회는 ‘남녀평등’한 공동체일까
한국은 남녀평등한 사회일까. 가장 첨예한 갈등의 원인이기도 한 이 질문에 대해서는 일단 답을 미루고 교회로 시선을 돌려보자. 질문을 바꿔 ‘한국교회는 남녀평등한 공동체일까’ 묻는다면 이번엔 확신을 가지고 고개를 좌우로 내저을 수밖에 없다. 여전히 적지 않은 교단이 여성에게 목사 안수를 주지 않고 있으며 교회 공동체 의사 결정의 주체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는 것이 안타까운 현실이다.
지난 로잔대회에서 발표된 케이프타운 서약은 ‘여성과 남성은 창조, 죄, 구원, 그리고 영적인 분야에서 동등하다’고 선언한다. 남성과 여성은 모두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존재로서 창조세계를 돌보는 공통의 임무를 가졌으며 같은 주님을 섬기고 같은 성령에 의해 감동을 받는다.
세계은행은 올해 여성의 날 보고서에서 ‘남녀불평등을 해소하는 것만으로 전 세계 GDP를 20% 가량 끌어올릴 수 있을 것’이라 예측했다. 이를 교회로 옮기면 교회 공동체 내 남녀불평등을 해소하는 것만으로 지상명령 성취에 훨씬 가까워질 수 있다는 얘기도 된다. 실제로 전 세계 곳곳의 선교 현장에서 하나님은 여성들을 사용하고 계신다.
중동 교회는 용감한 여성들이 복음을 전함으로 인해 박해받는 상황 가운데서도 성장을 거듭하고 있다고 전해진다. 중국의 경우 가정 교회 지도자의 절반 이상이 여성이라는 보고도 있다. 여성의 권리가 상대적으로 낮은 것으로 분류되는 아프리카와 남아시아에서도 여성들은 남성들과 함께 전도의 일꾼으로 쓰임받는다.
다만 로잔운동은 남성을 적으로 간주하고 적대적 행동을 취할 것을 요구하는 세속적 페미니즘에 대해서는 우려의 목소리를 전한다. 하나님의 구원 역사는 남녀가 서로를 적으로 두고 대립하는 것이 아닌 축복받은 동맹으로서 함께 협력하고 격려할 것을 권면하고 있다. 지금은 대위임령이라는 가장 큰 목표를 앞에 두고 형제자매들이 동등한 동료로서 서로를 포용할 때다.
장애인을 교회의 주체로
오늘날 전 세계 인구는 약 80억명으로 추산된다. 그중에 장애를 가진 인구는 얼마나 될까. 전 세계 인구의 6명 중 1명 꼴인 13억명이다. 이 13억명이라는 장애인의 수에는 지리학적 경계도 인구학적 특징도 없다. 잘 사는 사람이든 못 사는 사람이든, 한파에 떠는 극지방이든 온종일 땀을 흘리는 적도 지방이든 어느 곳의 누구에게나 장애는 존재할 수 있다. 지리적, 문화적 특성을 초월해 ‘장애인’을 타깃으로 하는 별도의 선교 전략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물론 장애 역시 단 하나의 단어로 묶기에는 너무나도 다양한 범주가 존재하는 것이 사실이다. 신체나 감각에 장애를 가진 이도 있고 지적 장애를 가진 이도 있다. 심지어 정신 건강의 문제도 장애로 분류되곤 한다. 다만 공통된 사실은 어떤 종류가 됐든 장애로 인해 차별과 고립, 편견과 낙인에 더 쉽게 노출된다는 점이다. 이것이 로잔운동이 ‘공정’과 ‘정의’라는 주제에서 장애인이라는 항목을 따로 다루는 이유다.
종종 장애인은 교회에서 돌봄을 받아야 하는 수혜자로 분류되곤 한다. 하지만 이제는 ‘도움이 필요한 존재’로 바라보는 것을 넘어 ‘교회를 섬기는 동등한 주체’로 나란히 세우는 작업이 필요한 시점이다. 국제장애인센터의 설립자 조니 에릭슨 타다는 “장애인이 사역하지 않는 한 장애인 사역이 아니다”라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를 위해선 교회가 장애인을 편견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포용적인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 안타깝게도 전체 인구에서 장애인 비율 대비 교회 내 장애인 비율은 훨씬 낮은 편이다. 교회는 장애인에게 복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이요, 그리스도의 제자로서 선교적 삶에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도록 기회를 제공해야 한다. 장애인을 향한 선교, 그리고 장애인에 의해 이루어지는 선교는 복음을 듣지 못하게 막는 문화, 계층, 사회의 장벽을 무너뜨릴 돌파구가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