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이면 강산이 달라진다. 100년이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다. 기술의 발전과 인식의 변화, 문화의 확장은 정치·경제 전반은 물론 우리의 일상까지도 뒤바꿔놨다. 교회와 선교도 예외는 아니다. 약 2천년 전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전해졌던 복음은 마차와 범선, 기차와 비행기에 몸을 싣더니 이제는 전 세계에 연결된 인터넷망을 타고 단 몇초만에 전달된다.
달라진 세상에서 교회의 모습과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2천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국제 로잔운동은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현실과 그에 맞는 선교 전략을 고민한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The State of the Great Commission Report)’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의 선교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작성한 보고서는 10가지 질문을 통해 교회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그에 맞춘 대안을 제시한다. 본지는 이번 호부터 10회에 걸쳐 로잔운동이 고민한 10가지 질문의 포장을 풀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모든 길은 로마로 통한다. 로마가 곧 세계의 중심이었던 그때는 ‘팍스 로마나’, 즉 로마에 의한 평화가 이뤄졌던 시기다. 하지만 역사상 가장 긴 시간 존재했던 빛나는 제국에도 끝은 있었다. 세계의 패권은 이슬람 제국으로, 서구 제국주의 국가로 넘나들다 아메리카 대륙의 손아귀로 들어갔다. 역사는 이토록 역동적으로 흐르고 움직인다. 영원한 패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는 얘기다.
세계 기독교 역시 역사의 강물을 타고 흐른다. 로마 제국의 변방 예루살렘에서 태동한 비주류 종교는 갖은 핍박과 고난을 이겨내고 제국의 공인종교 자리를 꿰찼다. 이후 오랜 시간 로마의 후계를 자처하는 유럽 대륙이 곧 기독교의 중심이었다. 근래에는 미국이 그 대열에 합류했지만 피부색은 여전했다. 불과 한 세기 전까지만 해도 선교란 ‘서구 국가들이 비서구 국가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로 인식됐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세속주의의 영향으로 서구 교회에서는 연일 ‘위기’라는 단어가 오르내리고 자연히 선교사 파송 숫자도 급감했다. 그 빈자리는 급속히 성장한 아시아와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와 성도들이 채웠다. ‘중심에서 주변으로’ 향하는 것이라 여겨져 왔던 선교는 사실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 향하는 것임을 새롭게 알게 됐다. 이렇게 급변한 세계 기독교의 양상을 바라보며 로잔운동은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그것은 바로 ‘다중심적 기독교란 무엇인가?’(What is Polycentric Christianity)라는 궁금증이다.
‘글로벌 사우스’가 떠오르다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기독교가 성장하고 있는 곳은 어디일까. 정답은 의외로 아프리카다. 앞으로도 이 흐름은 계속해서 이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세계 기독교 데이터베이스(World Christian Database)는 2020년부터 2050년까지 연평균 기독교 성장률 예상에서 중부 아프리카가 3.27%로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일 것이라 내다봤다. 동부 아프리카(2.93%)와 서부 아프리카(2.76%)는 잇따라 2, 3위를 차지했다. 그 뒤를 이은 것은 말레이시아(2.06%)와 남아시아(1.88%) 지역이다. 그에 반해 대부분의 유럽 대륙, 그리고 대한민국은 오히려 기독교 인구가 감소할 것이라고 추정했다.
1900년 당시 전 세계 기독교인의 80% 이상이 이른바 북반구, 즉 유럽과 북미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음을 생각하면 놀라운 변화다. 2020년에는 이미 상황이 역전돼 기독교인의 약 70%가 남반구에 거주하고 있다. 2050년에는 남반구 기독교인의 비율이 80%에 육박할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비서구권이 숫자에서 서구권을 넘어선 것에 반해 제도적 불균형은 여전하다. 아프리카와 라틴 아메리카에는 신학교 부족을 호소하고 있지만 기독교 인구가 감소 추세를 보이는 북미엔 교육 기관이 차고 넘친다. 그나마 서구권의 선교 투자가 100년 넘게 이어진 아시아권은 사정이 좀 나은 편이다.
언어에 따른 편중도 눈에 띈다. 전 세계 기독교인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언어는 스페인어지만 영어를 사용하는 신학교육 기관의 수(1,653개)는 스페인어 교육 기관(826개)의 수의 두 배에 달한다. 복음이 자유롭게 전파될 수 없는 국가의 경우는 더 심각하다. 중국어는 전 세계 기독교인들 사이에서 5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언어지만 중국어로 신학교육이 이뤄지는 기관은 단 77개에 불과하다.
초대교회는 처음부터 ‘다중심적’
한가지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세계 기독교 양상의 변화를 설명하기 위해 북반구와 남반구, 또는 서구권과 비서구권으로 나누어 설명했을 뿐 두 지역의 이분법적인 대립이 ‘다중심적 선교’의 핵심은 아니라는 점이다. 다중심적 선교의 본질은 비서구권 기독교인의 수가 서구권 기독교인의 수보다 많아졌다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곳에서 모든 곳으로의 선교’에 있다. 즉 세계 어디서든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고 어디든 선교지가 될 수 있다는 얘기다.
낯설게 느껴지는 것과는 달리 다중심적 선교는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초대교회의 선교는 처음부터 다중심적이었다는 것이다. 박해를 받은 초기 기독교인들은 로마 전역으로 흩어졌고 페니키아와 키프로스, 안디옥에까지 이르렀다. 당대 권력의 중심지였던 로마에서 주변으로 뻗어간 것이 아니라 변방 어디에서든, 그것도 가장 무시 받고 천대받던 이들에 의해 선교가 이뤄졌다.
현대에 이르러 다중심적 선교는 성장한 아시아, 아프리카, 라틴 아메리카 교회, 그리고 기존에 선교 기수를 맡았던 서구권에 의해 계승됐다. 선교단체 AIM(Africa Inland Mission)은 다중심적 선교의 모델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AIM은 서구 선교단체지만 아프리카 지부의 주요 직위는 현지 아프리카인의 몫이다. 운전대는 현지 기독교인들이 잡고 본부는 지원하며 협력하는 형태다. 기존엔 ‘AIM이 어떻게 선교할 것인가’에 집중했다면 이젠 ‘아프리카의 모든 종족을 위한 교회를 세우는 일’에 집중한다. 초점이 옮겨진 셈이다.
교육 기관의 편중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 다중심적 선교의 정착을 위해서는 교육이 보장되어야 한다. 모든 기독교인이 선교에 참여하도록 하기 위해서는 적절한 교육과 프로그램 설계를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사역을 위한 최소한의 재정도 뒷받침될 필요가 있다. 2020년 복음주의 기독교인의 소득을 조사한 결과 북미 기독교인의 소득은 전 세계 기독교인 소득의 65%를 차지했다. 전 세계 기독교인 중 북미 기독교인의 숫자가 10%에 불과함을 생각하면 놀라운 수치다. 부를 소유한 사람들이 선교에 더 책임감을 갖게 하고 전 세계적 네트워크와 채널을 구성하는 일, 그리고 새로운 자금원을 창출해내는 것이 다중심적 선교의 앞날에 주어진 숙제라고 하겠다.
지역별 고유한 전략 개발해야
예수님의 지상명령이 믿는 모든 자들에게 주어진 만큼 ‘다중심적 선교’가 선교의 본질이라는 것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문제는 어떻게 모든 이들이 선교에 참여하도록 동원하느냐다. 보고서는 다양한 지역의 성도들을 선교 자원으로 동원하기 위한 대안들을 소개한다.
첫째는 젊은 청년들의 의견에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보편적인 우려와는 달리 생각보다 청년들은 복음을 전하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고 자신의 은사가 어떻게 사용될 수 있을지를 궁금해한다. 기회가 연결된다면 그들은 자신의 시간과 재정을 드릴 준비가 되어 있다.
다음 계단은 복음으로 인해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선교로 인해 하나님을 알게 된 이들의 간증을 전하고 선교 현장에서 하나님이 어떻게 일하셨는지를 알리는 일은 중요하다. 이를 위해 새로운 기술과 소셜 미디어를 적극 활용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특히 영상 콘텐츠는 사역자들과 교회, 후원자 그룹을 연결하는 강력한 도구가 될 수 있다.
서구 교회만큼 선교 역사와 자원, 노하우가 축적되지 않은 비서구권 교회들이 선교에 참여하기 위한 숙제들도 풀어야 한다. 각 국가와 지역의 고유한 문화적, 사회경제적, 정치적 상황에 따라 고유한 전략을 개발하고 실행해나가는 작업이 필요하다.
사실 다중심적 선교가 편한 길이라고는 할 수 없다. 하지만 서구 중심의 돈과 권력에 의한 선교는 더 이상 지속되기 힘들고 그래서도 안 된다. 세계 교회는 이제야 모든 성도들에게 주어진 지상명령이라는 선교의 출발점으로 돌아왔다. 더 많은 땀을 흘린 만큼 그 열매는 훨씬 풍성하게 맺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