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들을 향한 교사의 체벌이 금지되며 교권은 나날이 추락한다. 급기야는 학생의 폭력에 의해 교사가 숨지는 사태까지 벌어진다. 이에 견디다 못한 교육부는 문제 학생 지도에 한해서라면 사실상 초법적 권한을 갖는 ‘교권보호국’, 이른바 ‘교권국’을 창설하기에 이른다. 특수부대 출신의 교권국 소속 공무원은 폭력도 서슴지 않고 휘두르며 학교폭력 가해 학생들을 ‘참교육’하기 시작한다.”
한 포털에서 인기리에 연재되는 웹툰 ‘참교육’의 대략적인 줄거리다. 독자들은 주인공 ‘나화진’이 문제 학생들을 거침없이 패대기치는 모습에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열정적인 환호를 보낸다. ‘체벌을 찬성하느냐’는 질문에 웹툰은 ‘가해자에게 똑같이 돌려줄 뿐’이라는 대사로 답한다. ‘참교육’이 해당 요일 인기 순위에서 최상위권에 올라 있는 모습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답해야 한다는 일명 ‘엄벌주의’에 대한 대중의 암묵적 지지다.
일단은 교육부 소속이니만큼 교권국의 활동은 설정상 ‘공적 제재’의 형태를 띠고 있지만, 내용을 뜯어보면 ‘사적 제재’라 보아도 무방할 정도의 조치다. 사적 제재와 엄벌주의에 대한 대중의 환호는 학교폭력 가해자를 향한 복수를 담은 드라마 ‘더 글로리’의 인기로도 증명됐다. ‘참교육’과 ‘더 글로리’가 이토록 화제가 된 것은 학교폭력에 대한 그동안의 조치가 솜방망이 처벌에 불과했다는 공감대가 확산됐기 때문일 테다.
하지만 격앙된 감정을 추스르고 침착하게 생각해보자. ‘역사적으로도 매가 약이었다’는 우스갯소리처럼 철저한 응징만이 학교폭력 해결의 길일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학생들을 품으려 애쓰는 기독교사들은 ‘엄벌’을 부르짖는 대중의 외침 속에서도 용기 있게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기독교사들과 함께 학교 안에서 발견하는 학교폭력 예방과 회복의 길을 찾아봤다.
학교는 ‘징계기관’ 아닌 ‘교육기관’
“학교가 존재하는 목적은 교육이다.” 너무도 당연하기에 오히려 의식하지 못한 명제다. 기독교사들의 모임 좋은교사운동의 한성준 공동대표는 이처럼 본질적이고 명확한 학교에 대한 정의로 엄벌주의는 옳지 않다고 목소리를 낸다.
징계가 목적이었다면 학교폭력이 발생할 때마다 경찰서에 넘기면 그만이다. 어떤 종류의 폭력이 됐든 폭력은 폭력이니 형사 처벌을 받게 하거나 민사상 책임을 묻게 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굳이 ‘학교폭력’이라는 명칭을 붙이고 사회 범죄와 다르게 바라보는 이유는 학교의 존재가 벌을 주는 것이 아닌 교육을 목적으로 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절대 벌을 줘서는 안 된다는 의미는 아니다. 하지만 벌이 교육적 효과를 발휘하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이 한 대표의 생각이다. 지금의 제도에서는 학교폭력 사건이 발생하면 일단 분리 조치를 하고 시작한다. 이후에는 거의 사법 체계에 준하는 면밀한 프로세스를 거쳐 결과가 나온다. 문제는 이렇게 학교폭력을 처리했을 때 근본적인 해결이 이루어지느냐다. 단순히 감정적 해소가 아닌 가해자의 반성과 피해자의 회복을 근본적인 해결이라 정의한다면, 적어도 지금 제도하에서는 요원하다.
한 대표는 “학교폭력이 발생하고 가해자가 사회봉사 15시간, 특별교육 20시간 조치를 받았다고 해보자. 가해 학생은 기계적으로 프로그램을 받고 오면 그만이다. 가해 학생이 교내 쓰레기를 주우면서 ‘내가 너무 잘못했다. 피해자에게 사과해야겠다’는 생각을 할까? 꿈같은 이야기다. 그런 프로그램을 수행하며 가해 학생이 반성하고 관계 회복을 시도하는 일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고 꼬집었다.
현행 제도에서 학교폭력 조치 결과는 생활기록부에 기재되고, 그것은 곧 상급학교 진학과 연결된다. 입시에 목숨을 거는 우리나라의 분위기상 일종의 엄벌이 이미 시행되고 있는 셈이다. 이런 조치가 갈등을 해결하거나 폭력을 경감시키는 일에 과연 도움이 될까. 기독교사들은 ‘그렇지 않다’고 입을 모은다.
교육을 지속해야 하는 학교 입장에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대입과 연결된 사안이라면 조금도 실수가 없게 처리해야 한다는 부담을 안게 된다. 이 과정에서 교사들은 가해 학생을 어떻게 바르게 교육할지, 피해 학생을 어떻게 위로하고 회복시킬지를 생각하기보다 절차상 하자 없이 문제를 처리하는 기계적 사고에 에너지를 쏟는다.
요즘의 학교폭력 양상은 단순히 신체적 폭력이 아니라는 점도 생각해볼 부분이다. 최근엔 사이버 폭력이나 언어 폭력의 비율이 늘어나는 추세다. 문제는 이런 종류의 폭력은 규명해내기가 쉽지 않을뿐더러 일방적이기보다 상호적일 때가 많다는 점. 누군가를 명백한 가해자로 지목하고 벌을 내리는 식의 조치를 취하기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그렇다면 대중들의 생각처럼 지금까지 학교폭력이 계속된 이유는 처분이 미온적이었기 때문일까. 이 질문에도 한성준 대표는 고개를 가로젓는다. 분명 적절한 조치가 취해지지 않은 몇몇 사례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지금까지의 기조 역시 ‘엄벌주의’에 가까웠다는 것이다.
한 대표는 “벌을 주면 교육이 되리라는 것은 너무도 단순한 논리다. 오히려 현실에선 벌을 주면 교육이 되지 않고 갈등이 증폭된다. 법정 다툼으로 이어지기 때문”이라며 “사형제를 생각해보면 이해가 쉽다. 사형제 시행이 중범죄율 감소에 대단한 기여를 하지 않는 것처럼 더 세게 벌을 준다고 학교폭력이 줄어들지는 않는다. 그저 대중적으로 시원해 보일 뿐”이라고 지적했다.
관계 회복이 최우선 과제
학교폭력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 속 ‘엄석대’로부터도 발견할 수 있듯 학교폭력은 아무리 뽑아도 고개를 내미는 잡초처럼 자라나는 아이들의 몸과 마음을 짓밟아왔다. 적절한 학교폭력 예방과 대응을 위해서는 학교폭력이 끊이지 않고 발생하는 근본적인 원인에 대해서도 고민할 필요가 있다.
한 대표는 “기저를 파고들면 결국 기형적으로 과열된 한국의 대입 경쟁이 있다. 과도한 경쟁은 불안감을 조성한다. 그리고 불안감은 사람을 예민하게 만든다”면서 “학부모들의 반응도 예민해졌다. 조그만 분쟁이 생겨도 입시에 치명적일 것이라는 생각이 들면 갈등 봉합을 위해 노력하기보다 변호사부터 구하는 형국이다. 우리나라의 과도한 입시 경쟁 구조가 학생과 학부모의 끊임없는 불안과 스트레스를 유발하고 학교폭력에 대해서도 예민하게 대응하도록 만들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렇기에 더더욱 징계와 벌이라는 단순한 수단으로 학교폭력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 된다. 가장 처음 제시했던 ‘학교는 교육기관’이라는 본질적인 정의처럼 교육을 통한 예방에 최선을 다해야 한다는 것이 좋은교사운동의 주장이다.
무엇을 교육해야 할까. 성적을 내는 방법만 주입받은 학생들은 성장기에 끓어오르는 혈기를 어떻게 건강하게 발산해야 하는지를 배우지 못했다. 때문에 갈등이 왜 발생하는지를 교사와 학생이 함께 탐구하고 갈등이 벌어졌을 때는 어떻게 관계를 풀어가야 하는지, 그리고 좌절된 내 욕구와 불쾌한 감정들을 어떻게 조정하고 표현할 수 있는지를 교육해야 한다.
예방 교육을 아무리 철저히 해도 학교폭력을 원천 봉쇄할 수는 없는 일. 일단 사건이 발생했다면 관계 회복에 중점을 두는 사후 조치가 필요하다. 한 대표는 현행 학교폭력예방법에 ‘가해 학생과 피해 학생의 관계 회복을 위해 프로그램을 운영할 수 있다’고 규정된 항목에서 힌트를 찾았다. 다만 지금은 허울뿐인 프로그램에 재정과 인력을 투입해 실효성을 갖추고 ‘내실화’하는 작업이 꼭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나아가서는 학급이라는 공동체의 회복까지도 고려해야 한다. 결국 가해자와 피해자 두 학생이 있는 곳, 그리고 계속 생활해야 할 곳은 교실이기 때문이다. 학교폭력이 발생하면 학생이 소속된 공동체의 질서 역시도 무너진다. 관련 학생들에게 우리 학급이라는 공동체의 회복을 위해 어떤 노력을 할 수 있는지 묻고 함께 대안을 찾는 과정이 중요하다.
그는 “학교폭력이 발생했다면 가장 중요한 일은 가해 관련 학생과 피해 관련 학생이 관계를 회복하는 일이다. 가해 학생이 어떤 책임을 질 수 있는지, 피해 학생이 무엇을 요구하는지 파악하고 관계를 회복시켜야 한다. 관계 회복이 가장 교육적인 조치라고 본다. 프로그램이 제대로 이뤄진다면 사소한 말다툼부터 물리적 피해까지도 회복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며 “실제적인 반성과 실제적인 회복이 가장 기독교적인 대안이다. 끊어진 관계를 다시 회복시키고 공동체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만큼 기독교적인 것은 없다고 본다”고 강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