굳이 듣고 싶지 않았던 고리타분한 일장 연설을 늘어놓을 때. 이미 알고 있는 실수를 구태여 꼬집으며 훈계할 때. 전혀 공감이 가지 않는 옛일을 끄집어내 가르치려 들 때. 무언가 불편함과 답답함이 느껴지는 그 순간 우리는 외친다. “나한테 설교하지 마!”
‘설교’가 어쩌다 이런 부정적 뉘앙스를 띠게 됐을까. ‘견해나 관점을 단단히 타일러 가르침’이란 뜻도 있다고는 하지만, 대부분 개신교 안에서 한정적으로 사용되는 단어임을 감안하면 썩 유쾌하지 않은 일이다. 지루하고 답답한 순간 “설교하지 마라”고 외친다는 것은 곧 본뜻인 설교 역시 고리타분한 잔소리로 느껴진다는 것. 설교에 예배 시간의 대부분을 할애하는 한국교회로서는 가벼이 생각할 일이 아니다.
어느새 설교는 한국교회의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순서로 자리 잡았다. 종종 예배는 곧 ‘목사님 설교 들으러 가는 것’으로 동일시되기도 한다. 목회데이터연구소의 조사에 따르면 ‘현재 출석하는 교회를 선택한 이유’를 묻자 ‘설교 내용이 좋다’가 41%(1+2순위)로 1위를 차지했다. 그만큼 설교가 크리스천의 신앙생활에 막중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바른 설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주는 지표이자 설교의 회복이 왜 절실한지를 가르쳐주는 지표이기도 하다.
‘예수’가 빠진 설교라면
감동적인 설교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꿀 영향력을 지녔다. 바꿔 말하면 설교에서 나온 말실수 하나가 어느 한 영혼을 교회에서 떠나게도 할 수 있다는 얘기다. 눈물을 쏙 빼고 가슴을 치게 할 설교까지는 하지 못하더라도 적어도 듣는 이들을 시험에 들게 할 설교는 되지 않아야 한다. 설교를 ‘잘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잘못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일 수 있다.
그렇다면 ‘잘못된 설교’란 어떤 설교일까. 그로브시티대학 종교학 교수이자 그레이스 교회 담임인 데이비드 고든은 <우리 목사님은 왜 설교를 못할까>라는 다소 자극적인 제목의 저서에서 잘못된 설교의 예시를 설명한다.
그가 가장 먼저 꼽은 설교의 암세포는 ‘도덕주의’다. 어떤 설교자들은 ‘좋은 사람이 돼라’거나 ‘좋은 일을 하라’는 권고를 메시지의 핵심 주제로 삼는다. 올바른 생활과 윤리적인 일에 지나치게 초점이 맞춰질수록 죄에서 자유를 얻게 하는 구속의 복음은 그림자 뒤편에 가려진다. 이런 설교가 반복되면 기독교는 윤리 체계로 변질되고 예수 그리스도는 그저 도덕을 가르친 위대한 스승으로 격하되고 만다.
기독교는 ‘윤리적인 종교’일지는 몰라도 ‘윤리의 종교’는 아니다. 행실을 고쳐 좋은 사람을 만드는 것을 설교의 목적으로 삼는다면 기독교의 본질과는 한참 멀어진 것이다. 도리어 성경은 선한 행실을 포함한 어떠한 스스로의 노력으로도 구원에 이를 수 없는 존재론적 죄인이 바로 우리라고 거듭 강조한다.
이에 편승한 것이 다음 등장하는 ‘요령을 가르치는 설교’다. 이런 설교는 요령만 제대로 익히면 죄인도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설득한다. 데이비드 고든은 “요령을 가르치는 설교는 도덕주의보다 더 해로운 면이 있다. 인생과 종교, 삶과 죽음, 존재와 구원의 문제를 고작 요령 따위로 축소시키기 때문”이라며 “이는 도덕주의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의 구원의 능력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거나, 설교의 말미에 의무적으로 덧붙이는 것에 그친다”고 지적했다.
‘자기성찰’만을 강조하는 설교를 비판한 대목도 흥미롭다. 교회에서는 종종 ‘당신이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생각했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는 식의 설교를 접하곤 한다.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라는 말씀도 있듯, 본인의 신앙을 돌아보는 일은 필요하다. 하지만 이런 설교만을 반복해서 듣는 것은 고역이다. 약하고 불완전한 믿음일지라도 믿음은 믿음인데, ‘당신들은 사실 믿음이 없다’는 소리를 계속 들으면 정말 믿음이 없는 것 같은 생각마저 들고 만다. 고든은 이런 설교를 가리켜 “다른 사람을 꾸짖는 것을 사명으로 아는 설교에는 배울 것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한국교회에서 좀 더 자주 볼 수 있는 유형은 세상의 성공을 강조하는 설교다. 마치 사회적으로 성공해야만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있는 것이라 오해하게 만들고, 나아가 헌금을 통해 자신의 믿음을 증명해야 성공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친다. 심지어는 목사에 대한 순종이 곧 하나님의 순종이라고 호도하는 경우도 목격한다.
쉽게, 좁게, 깊이있게
“설교는 영광스러운 소명이다.” TGC 대표 줄리어스 김이 저술한 <설교학> 서문의 첫 문장이다. 코로나 팬데믹 시대를 지나며 설교의 중요성은 한층 강조됐다. 모이는 예배가 온라인 예배로 대체되면서 교제와 나눔을 할 수 없게 된 대신 자연히 설교에 비중이 실렸다. 이제 다시 대면 예배가 회복됐지만 코로나의 영향은 잔존해있다. 많은 교회들이 대면 예배와 동시에 온라인 예배를 병행하고, 영상으로 메시지를 송출한다. 설교를 준비하는 목회자들의 어깨가 한층 무거워진 셈이다.
금천설교아카데미를 이끄는 김진홍 목사는 설교 준비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힘주어 말한다. 김 목사가 생각하는 좋은 설교란 ‘쉽게, 좁게, 깊게’의 원칙을 지키는 설교다. ‘쉽게’란 말 그대로 설교를 어렵지 않게 한다는 것이고, ‘좁게’란 원래 전달하려는 주제와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는 것이다. ‘깊게’는 설교에도 영성이 있어야 함을 의미한다.
성도들의 마음에 와닿는 실제적인 설교를 하는 것도 중요하다. ‘옛날 옛적에’로 시작하는 오래전 유명인들의 사건보다 설교자 본인이 어제 느꼈던 묵상, 지난주 있었던 작은 갈등을 들려주는 것이 훨씬 이목을 집중시킨다. 신앙생활은 매일매일의 일상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것이다. 지금도 살아계시는 예수님은 출근길 지하철에도, 식사를 준비하는 손길에도 함께 계신다. 설교 역시 성도들의 일상을 만지는 메시지여야 한다.
여러 설교 유형들을 공부하는 것도 도움이 된다. 매주일마다 설교가 ‘첫째, 둘째, 셋째’로 이어지는 3대지 설교로 구성된다면 성도들도 지루함을 느끼기 마련. 익숙한 3대지 설교 외에도 원포인트 설교, 4페이지 설교, 이야기 설교, 본문 접맥식 설교 등 다양한 설교 유형들을 학습해 소화해낸다면 성도들도 기대감을 갖고 예배당에 들어서게 된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설교에 임하는 자세다. 올해 작고한 세계 기독교의 거장 팀 켈러 목사는 위대한 설교의 비결을 세 가지로 설명한다. 첫째는 설교자의 철저한 준비이며, 둘째는 간절한 기도이고, 셋째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 준비와 기도의 중요성은 모두가 공감할 만한 것이라면 세 번째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 특히 눈에 띈다.
팀 켈러가 생각하는 설교에 가장 중요한 요소는 화려한 웅변도 수사학적 기술도 아니다. 설교의 본질은 청중에게 재미와 즐거움을 주는 것에 있지 않다. 그는 “하나님과 사람을 사랑하는 마음만으로 위대한 설교를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 마음을 가지지 않는 위대한 설교는 존재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