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등학교에서부터 대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리고 성인이 된 후 지자체 선거와 국회의원, 대통령 선거에 이르기까지 무기명 비밀투표 외에 다른 방법을 사용해 투표를 한 기억이 있는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거의, 아니 없을 것이다.
하지만 투표가 아닌 제비뽑기를 통해 선거를 하는 곳이 있다. ‘제비뽑기’는 ‘제비를 만들어 승부나 차례를 정하는 일’이라는 뜻으로, 성경에는 이 방법을 사용한 기록들이 수없이 등장한다.
아론은 제비 뽑은 염소로 속죄제를 드렸고(레 16:9), 이스라엘 자손들은 땅을 제비 뽑아 나누었다(민 26:55). 또한 예수께서 십자가에 못박히신 후 로마 병정들이 예수의 옷을 제비 뽑아 나누어 가졌고(마 27:35), 제비뽑기를 통해 유다 대신 맛디아를 12제자 중 한 사람으로 세웠다(행 1:26). 이런 성경의 내용들이 교단을 대표하는 인물들을 제비뽑기로 선출하게 된 근거다.
9월, 장로교단 총회에서 이 풍경이 연출됐다. 바로 그 제비뽑기. 투표로 교단장을 선출할 것이라는 당연한 생각을 여지없이 무너뜨리는, 이른바 뒤통수를 치는 투표 방법이 등장한 것이다.
제비뽑기를 실시하는 교단은 예장 합동. 한국에 있는 교단 중에서 유일하다. “성경적”이라고 주장하는 부류가 있는 반면, “비 민주적”이라고 반대하는 부류도 있다. 하지만 교단장을 선출하는 방법으로 제비뽑기를 선택한 당사자인 합동측으로서는 그리 자랑스러운 결정은 아니었다. 꼭 10년 전인 지난 2000년 ‘제85회 총회’에서 결정된 사항이었다.
선거법 개정연구위원회가 제비뽑기를 총회에 제안할 당시만 해도 “총회를 대표하는 인물을 제비뽑기로 선출하는 것이 받아들여질까?”라는 의견이 강했다. 하지만 막상 뚜껑을 열어보니 총대들은 앞 다투어 “허락이요!”를 외쳐대며 제비뽑기를 받아들였다. “금권선거를 뿌리 뽑기 위해서는, 선거제도를 개혁하기 위해서는 제비뽑기를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총대들의 의지가 그만큼 강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제비뽑기를 환영하기만 할까. 아니다. 지난 27일 합동 총회가 열린 자리에서 일부 총대들은 ‘직선제 헌법 수호’, ‘헌법 수호’라는 구호가 적힌 피킷을 들고 나와 총회가 개최된 자리에서 시위를 벌였다. “제비뽑기를 철회하고 직선제 투표를 실시하라”는 주장이었다.
제비뽑기가 합동측만의 일이었을까. 결과적으로는 현재 합동측만이 제비뽑기를 실시하고 있지만, 같은 장로교단인 통합측도 제비뽑기 도입을 심각하게 고려한 적이 있었다. 비단 통합측 뿐만이 아니었고, 성결교단과 감리교단 등 많은 교단들에서 제비뽑기 여론이 형성되기도 했다.
합동측이 제비뽑기를 결정한 지난 2000년 이후 통합측 또한 “금권선거를 뿌리 뽑고 과열되는 선거 풍토를 바로잡기 위해서는 제비뽑기의 도입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주장이 제기됐었다. 이 분위기는 젊은 목회자 그룹과 교단 내 갱신 그룹을 중심으로 확산됐고, 전국을 돌며 제비뽑기 도입을 위한 설명회가 개최되기도 했다. 교단도 이를 받아들여 제비뽑기 도입을 위한 연구 결정을 내리기도 했지만, 결국 도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면 교단 헌법에서는 어떻게 규정할까. 통합총회의 경우 모든 선거에 있어 ‘투표’로 결정한다고 돼있다. 감리교의 경우도 ‘[1021]제10조(감독 및 감독회장 선거)’에 보면 ‘무기명 비밀투표’로 명기하고 있다.
민주주의 사회에서 투표는 민의를 결정하는 최고의 방법이지만, 교회에서는 제비뽑기를 실시하는 곳도 있다. 그리고 성경에서 하나님의 뜻을 묻거나 결정을 내릴 때 사용했던 방법은 제비뽑기였다. 하지만 제비뽑기를 하건 투표를 실시하든 그것은 총회가 교단의 형편과 정서를 감안해 내린 최선의 결정이다.
[한국 교회, 다름과 닮음-20] 선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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