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를 낳아 키워본 이들은 성장 과정에서 수없이 감격하게 된다. 아이가 엄마 아빠를 알아볼 때, 뒤집기에 성공하고 기어가기 시작할 때, 혼자 일어서 걸음을 떼기 시작할 때 등… 내게는 그보다 더 잊을 수 없는 순간이 있다. 먹을 것을 손에 쥐면 제 입에만 넣던 아이가, 어느 날 그걸 내 입에 넣어줄 때! 젖먹이 아이는 자기밖에 모른다. 그러나 조금 더 성장하면 부모의 존재, 다른 사람들의 존재를 인식하게 된다. 마치 1차 방정식에서 2차 방정식으로 발전해가듯. 자신만을 상황을 바꿀 수 있는 변수로 여기다가, 다른 사람들도 변수가 될 수 있음을 깨닫게 되는 게 인생이다.
그럼에도 세상에는 자신만이 세상의 변수라 믿는 ‘어른아이’들이 적지 않다. 몸은 성인이지만 심리적으로는 어린아이의 상태인 정신적 증상을 '피터 팬 증후군(Peter Pan Syndrome)'이라 하는데 이 ‘어른아이’들은 늘 남에게 의존한다. 자신을 남들로부터 받아야 하는 사람(Taker)으로, 남들은 자신에게 주어야 하는 사람(Giver)로 여긴다. 이들에게 남들은 ‘우리(We)’가 아니라 그저 ‘그들(They)’일 뿐이다.
나는 금요일마다 영락교회 직장인예배에 간다. 어느덧 44년째다. 우리 예배를 담당하는 목사님은 처음 참석한 이들에게 커피를 선물한다. 교회 앞 A커피숍에 가서 주보를 보여주고 커피를 받아가게 한다. 이른 바 ‘선결제’. 커피값을 미리 지불해놓은 것이다. ‘선결제’는 비상계엄과 대통령 탄핵을 외치는 시위현장에서 유명해졌다. 시위에 참여하지 못하는 이들이 시위 현장 인근의 음식점, 커피숍 등에 대금을 미리 송금해줌으로써 시위하는 이들이 음식을 무료로 받을 수 있게 하는 것이다.
기독교에서는 구원을 3단계로 설명한다. 첫 단계는 믿음으로 의롭다고 인정을 받는 칭의(稱義;Justification). 과거적 구원이다. 두 번째 단계는 죄악된 옛 본성을 벗고 죄와 더러움에서 분리되어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을 닮아가는 성화(聖化;Sacrification). 현재적 구원이다. 세 번째는 죄와 그 결과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어 그리스도의 보좌 앞 성결한 자리에 이르는 영화(榮化;Glorification). 미래적 구원이다. 우리가 나이를 먹어 가듯이 그리스도인도 한 단계씩 성숙해야 하는데, 필자를 포함하여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평생 첫 단계를 벗어나지 못한 채 ‘어른아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가니 참 안타까운 일이다.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預言者)가 보이지 않는다
누가 어른인가? 남을 ‘나’로, 공동체를 ‘우리’로 여기는 사람이 어른이다. 그런 점에서 그리스도인은 대한민국 공동체를 버텨주는 어른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이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과연 어른 노릇을 하고 있는가? 20대, 30대 젊은 여성들이 추운 밤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앉아 나라의 안위를 위해 목이 쉬도록 외치고 있지 않은가. 시민들은 그들을 위해 선결제를 해주고, 화장실 지도를 만들어 나눠주고, 버스를 빌려 유아들 쉼터를 제공해 주고 있지 않은가. 이런 상황에서 교회는 무엇을 하고 있느냐고 묻는 이들이 많다. 뭐라고 대답할지….
화장실 개방 요청을 거절한 교회에서 울려 퍼지는 성탄절 칸타타 연주, 교회 종탑의 화려한 성탄 트리가 시민들에게 어떤 의미를 줄까. 어떤 이는 “이 땅에 종교의 존재 의미는 사랑이 필요한 곳에 ‘가장 먼저’ ‘가장 강하게’ ‘가장 끝까지’ 사랑을 전하는 것”이라며 종교계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지인 한 분이 내게 이런 질문을 해왔다. "얼마 전에는 광화문 광장에 많은 교인들이 모여 기도회를 개최했는데, 국민의 생명과 자유를 위협하는 계엄 선포에 대해서는 왜 침묵하느냐?"고. 대통령 탄핵을 찬성하든 반대하든 누가 대답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점쟁이 예언자(豫言者)들은 많은데, 하나님의 뜻을 전하는 예언자(預言者)는 찾아보기가 어렵다.
오늘 우리 교회는 시대를 제대로 읽지 못하는 것 같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를 판단하기를 주저하는 것 같다. 그래서 대중과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것 같다. 몸은 비대한데 여전히 나잇값을 하지 못하는 어른아이 모습이다. 이래 가지고 전도나 다음 세대를 기대할 수 있겠는가.
그 사이에 새해가 밝아왔다. 새해에는 우리 교회가 나잇값을 제대로 했으면 좋겠다. 예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곳에 몸을 던지자! 공의를 필요로 하는 곳에 한 줌의 소금이 되자!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조국을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이 넘치는 나라로 세우자!
“흘러 나게 해라, 정의가 물처럼. 공의가 늘 흐르는 냇물처럼!” (새한글성경 아모스 5: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