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자들께 제안을 하나 해보려 한다.
자신의 혀를 팔꿈치에 닿게 해보시라. 아마 잘 안될 것이다. 강의를 시작할 때 이런 걸 해보자고 하곤 하는데, 성공하는 이가 거의 없다.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게 무엇인지 SNS 친구들에게 물어본 적이 있다. 그 중 몇 가지를 나눠본다.
“다른 사람의 마음 사기” “죽었다 깨어나기” “짜놓은 치약 다시 집어넣기” “내 생각을 남의 머리에 넣기” “남의 돈 내 주머니로 옮겨 오기” “자식 잘 키우기” “사춘기 아이 핸드폰 사용 금지 시키기” “시간 되돌리기” “후회하지 않기” “AI 이기기” “나 자신으로 살아가기” “남북 통일하기” “아내 마음 이해하기” “지난주 설교 말씀 생각해내기” “남을 용서하기” “변화 받아들이기” “사람을 바꾸기” “예수를 진정으로 믿기” “원수 사랑하기” “범사에 감사하기” “자기 자신을 온전히 알기” “대화 안 되는 사람과 대화하기” 등.
세상에 어려운 일이 어디 이뿐이겠는가. 나는 여기에 “자기 이름대로 살기”를 더하고 싶다. 내 이름은 ‘義容’이다. ‘옳을 의’ ‘얼굴 용’, 영어로는 “right face” 얼마나 부담스러운 이름인가. 그러던 중 ‘容’자에 ‘받아들인다’, ‘수용한다’는 뜻도 있음을 알고 조금은 부담을 덜었다.
‘이름’은 ‘이르다’에서 나왔다. 어떤 사람을 무엇으로 이르느냐(부르느냐). 이름은 그 사람의 정체성이다. 요즘 대학생들 출석부를 살펴보면 우리말 이름이 절반은 되는 것 같다. 한자로 된 이름이 아닌 우리말 이름에도 깊은 뜻이 있다. 그래서 나도 우리 아이들 이름을 우리말로 지었다. 모든 이름에는 부모의 간절한 소망이 담겨 있다. 그래서 나는 이름 대신 번호로 사람을 부르는 걸 반대한다. 이름을 불러준다는 것 자체가 그를 축복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름을 지어줄 때 부모는 자녀가 성년이 된 후 불편해하지 않도록 여러모로 배려할 필요가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은.
이름대로 사는 것도 어렵지만, 직업의 이름대로 살기도 어려운 것 같다. 박황희 선생은 ‘판사(判事)’, ‘변호사(辯護士)’, ‘의사(醫師)’처럼 ‘사’ 발음으로 끝나는 직업을 ‘사(事)’,‘사(士)’,‘사(師)’의 군으로 나눠 설명한다. 판사(判事), 검사(檢事), 도지사(道知事)처럼 일 ‘사(事)’자로 분류되는 직업은 신분과 지위를 나타낸다. 변호사(辯護士), 세무사(稅務士), 변리사(辨理士)처럼 선비 ‘사(士)’자로 분류되는 일련의 직업군은 ‘자격’의 의미를 내포한다. 목사(牧師), 의사(醫師), 교사(敎師)처럼 스승 ‘사(師)’자로 분류되는 직업은 ‘존경’의 의미를 내재한다. 판사와 변호사와 달리, 의사에게만 ‘의사 선생님’이라고 칭하는 이유다.
“그리스도인 이름으로
공의와 정의 펼치며 살아가야…”
‘직업(職業)’이란 말은 공적(公的)인 책임(職)과 사적(私的)인 생계 수단(業)을 뜻한다. 요즘 우리가 겪고 있는 국가적인 위기상황은 몰지각한 공직자들이 공(公)보다 사(私), 직(職)보다 업(業)을 우선으로 여기려는 데서 비롯되었다. 비록 ‘사(師)’로 불리는 직업군은 아니더라도 대통령, 장관, 군대 지휘관, 검사, 국회의원 같은 이들이 공적인 책임(공의와 정의)을 무겁게 여겨야 했다. 그런데 그런 책임자들 중에 ‘그리스도인’들이 자꾸 보여 우리를 안타깝게 한다.
교회도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기가 쉽지 않은 것 같다. 교회의 이름 중에는 ‘00동교회’처럼 지명을 딴 데도 있지만, 기독교의 구체적인 정체성을 담고 있는 곳도 많다. 그런 교회들이 그 이름값을 제대로 하고 있는지는 비신자들을 대상으로 한 호감도, 신뢰도 조사 결과에 너무도 잘 나타나 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교회로만 부르지 않으셨다. 또한 목사(牧師), 장로(長老), 권사(勸士), 집사(執事), 성도(聖徒)로만 부르지 않으셨다. 가정과 세상 속으로 부르셨고, 다양한 직업 현장으로 부르셨다. 거기에서 부모로, 배우자로, 자녀로 그리고 직장인으로, 시민으로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으로 살아가야 한다. 교회가 지금처럼 직분자를 대상으로 제직훈련만 시킨다면 그들은 세상 속에서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기 어렵게 된다.
이제라도 교회는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속에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세상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직업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어떤 가치관과 태도로 그 일을 수행해야 하는지를 제대로 가르쳐야 한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이 지금 우리 사회에 절실한 공의와 정의를 펼치며, 소금과 빛으로 살아가도록 도와야 한다. 공의와 정의보다 더 확실한 사랑법은 없다.
“오직 정의를 물 같이, 공의를 마르지 않는 강 같이 흐르게 할지어다”(아모스 5:24) 교회든 직업인이든 이름값 좀 하며 살자! 거룩한 부담감을 좀 갖고 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