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자기 소천한 아버지를 이어 2019년부터 사역
포천지역 다음세대를 위한 문화사역 위해 기도
만왕의 왕으로 이 땅에 임했지만, 아기 예수님은 가축들의 냄새가 진동하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가장 낮은 곳에서 태어나신 것은 겸손의 신비였다. 가난하고 소외된 자들과 함께하겠다는 의지였다. 성탄의 기쁜 소식조차 천대받던 들판의 양치기들에게 가장 먼저 전해졌다.
예수님은 누구신가? 가진 것이 없는 자들의 친구이며, 그들을 풍성하게 먹이시는 분이다. 빈자의 친구로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따라 나눔을 실천하고 있는 ‘주동행교회’ 이수용 목사를 만났다. 부유함을 갈망하는 시대, 성탄의 참의미를 통해 ‘없는 자들에게 풍성’을 선물하는 복된 성탄이 되기를 소망한다.
질끈 동여맨 꽁지머리에 훤칠한 키와 얼굴의 젊은 목회자가 지하 예배당에 설치된 소소한 성탄트리 곁에서 잔잔한 미소를 짓는다. 웃을 수만은 없는 현실 속에서도 주님의 은혜로 5년째 무료급식소를 책임지고 있는 이 목회자의 이름은 이수용. 주동행교회 이수용 목사는 2019년 갑자기 쓰러져 주님 품으로 떠난 아버지 고 이춘기 목사의 뒤를 이어 후미진 지하 예배당으로 돌아왔다. 제대로 주님을 만난 후 문화목회를 향한 비전을 품었지만 모든 것을 내려놓았다. 찬송가 96장 ‘예수님은 누구신가’에 나오는 “없는 자의 풍성”이 되었던 예수님처럼 살고자 했던 아버지의 뜻을 계승하기로 결단한 것. 꿈마저 내려놓고 포천시 소홀읍에서 사회적 약자들과 호흡하고 있는 30대 중반의 한 목사의 삶과 사역을 들여다본다.
경기도 포천의 한 상가 지하. 이곳에 위치한 주동행교회는 경건하기보다 어수선하다. 그도 그럴 것이 교회가 곧 밥집인 ‘무료급식소’를 운영하기 때문이다. 예배당에는 막 지어낸 밥과 시래기국 냄새가 가득했다. 정오가 되자 약속이나 한 듯 차례로 어르신들이 찾아든다. 곧이어 감색 보온조끼 위에 긴 외투를 걸친 이수용 목사가 들어와 반갑게 악수를 청한다. 식사 중이던 어르신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젊은 목사에게 식사하셨냐며 말을 건네고 인사한다. 손주라도 찾아온 듯 친근하면서도, 강한 신뢰가 느껴지는 어투가 인상적이다.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었어요. 급식소를 이용하는 분들도, 봉사자들도 젊은 사람이 얼마나 버티겠냐는 시선이었죠. 이제는 장난도 농담도 많이 합니다. 길에서 만나도 대화를 많이 나누다 보니 더 가까워졌고, 꾸준히 애쓰는 모습에 신뢰도 주고 마음도 여셨어요.”
근래 이수용 목사가 급식소 운영을 위해 외부 활동할 때가 많아지고, 박유혜 사모가 셋째를 출산한 이후 카페를 운영하며 바빠지자 장인 박영호 집사와 장모 문현희 권사가 6개월 전부터 무료 급식소를 살뜰히 챙기고 있다.
시련 넘어 부어주신 은혜
이수용 목사의 부친 고 이춘기 목사는 2008년 6월 생면부지 포천에서 주동행교회를 개척하고 주말 무료급식을 시작했다. 사업 실패 후 주님을 만나 뒤늦게 신학을 공부한 아버지를 처음엔 이해할 수 없었다. 사서 고생하면서도 아버지는 예수님처럼 낮은 곳을 향했다. 하지만 아들 이수용은 반대 방향으로 나가고 있었다.
신앙마저 거부하고 대학에서 베이스기타를 전공하면서는 집에도 잘 가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 어머니 김은숙 사모는 홀로 아버지와 두 자녀의 학비를 벌려고 24시간 식당에서 고생해야 했다.
백석예술대학교에서 실용음악을 전공하던 청년 이수용에게 큰 시련이 찾아왔다. 알 수 없는 이유로 손에 마비가 생겨 악기를 제대로 연주할 수 없게 된 것. 방황하면서 술과 담배에 찌든 세월이 계속됐다. 아들의 모습을 안타깝게 여기던 아버지는 음악 선교단체 활동을 추천했고, 아들을 차츰 회복되어 갔다. 무엇보다 잠시 활동했던 선교단체에서 아내를 만났다. 이 목사에게 그것은 최고의 축복이었다.
“결혼을 반대하던 장모님이 내건 조건은 제가 신학을 공부하는 것이었어요. 작정하고 기도원에 가서 기도하는데 은혜를 부어주시는 겁니다. 그렇게 백석대 신학원에 진학했고, 이후 아버지 소속의 교단 합신에서 신대원 공부를 했습니다.”
갈수록 야위는데 외면 못해
무뚝뚝하던 아버지는 며느리에게 아주 살갑게 예뻐해 주었다. 이수용 목사는 결혼하면서 아버지의 사역과 삶도 이해하게 됐다. 그러나 아버지의 사역과 자신의 미래는 엄연히 다른 것이었다. 신대원 재학 중 다른 교회에서 부교역자로 시무하게 됐다. 처음에는 작은 교회에서 시작해 이후 규모가 있는 교회에서 사역을 이어갔다.
지금도 뒤돌아보면, 이수용 목사에게 부교역자 시절은 인생에서 가장 최선을 다해 살았던 시기인지 모른다. 찬양팀, 청소년 사역을 맡으면서 청년 사역의 비전을 품었다. 특히 일본 선교에 대한 관심이 커지면서, 일본의 청년들을 섬겨야겠다고 마음을 품고 신대원 은사님과 면담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다른 길을 보여주셨다.
“교수님을 만나 선교 훈련과 후원자 개발까지 의논한 다음날, 아버지가 갑자기 쓰러져 돌아가셨습니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사역하겠다는 건 제 뜻이 아니었어요. 먼저 어머니가 원하셨고, 노회 선배 목회자들이 권하셨습니다. 특히 아내가 급식 사역을 맡는 게 하나님의 뜻 같다고 이야기하는 겁니다.”
아내는 고난의 길을 자원했고, 아직 신대원도 졸업하지 못한 전도사는 주님의 뜻으로 알고 순종하기로 마음먹었다.
더구나 아버지가 처음 급식했을 때는 주말만 했는데, 이후 주중에 무료급식을 하던 사단법인 솔모루1%사랑나누기운동본부가 합류하면서 쉬는 날도 없다. 가건물이라는 이유로 급식을 할 수 없도록 행정조치가 나오자 주중 급식을 이춘기 목사가 품어버렸다.
사단법인 이사장은 이웃 송우교회의 이제승 원로장로가 맡고 있었다. 매일 같이 급식해야 하는 건 젊은 부부에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심지어 교회로 급식 활동을 이전했다면서 자원봉사자 절반 이상이 떠나 손길마저 부족했다.
최근에야 교회에서 주는 사례비도 70만원으로 올랐지만, 당시 사례비는 50만원에 불과했다. 다행히 소속 노회 차원에서 150만원을 매월 후원해준 게 큰 힘이 됐다.
박유혜 사모는 “하나님께서 굶기진 않겠다는 마음을 주셔서 아버지의 뒤를 잇자고 남편에게 먼저 제안했다. 교회는 작지만 그곳에 있는 영혼들을, 급식이 필요한 분들을 도저히 나 몰라라 할 수는 없었다”고 당시 상황을 들려주었다.
“코로나19 때는 방역기준 때문에 현장 급식을 중단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데 길에서 급식소를 오던 분들을 만나면 볼 때마다 야위어 있는 겁니다. 정말 가관이 아니었어요. 미안해서 눈조차 마주칠 수 없어 집에서 둘이 울기도 많이 울었습니다. 아무리 힘들어도 밥과 국을 해보자고 마음먹고 이후 2년 동안 도시락을 만들어 배달에 나섰습니다.”
지금도 밥을 굶은 사람은 분명 있었다. 도시락을 나눠주자 다시 소외된 이웃들의 살이 올랐다. 작은 사랑의 나눔에도 그들은 풍성해졌다. 어려운 여건 속에서도 돕는 손길이 있었다. 또 이제승 장로와 봉사자들은 기댈 수 있는 어른이었다. 늘 곁에서 젊은 목회자 부부를 응원하고 지지해 주었다.
하나님 이끄시는대로 순종
요즘 이수용 목사는 기도하고 있는 제목이 있다. 무료급식소를 찾는 이웃들은 최선을 다해 섬길 것이지만, 이제 그 어르신들이 세상을 떠나면 다른 어떤 사역을 펼쳐야 할지 구상 중이다. 다행히 이수용 목사는 보컬 트레이닝을 할 수 있고, 수준급의 기타 실력을 갖추고 있다. 박유혜 사모는 꽤 실력있는 커피 바리스타이다.
최근 포천세무소 건물 1층에 작은 카페 문을 연 것도 미래 사역을 위한 조심스러운 준비이다. 포천에는 제대로 된 문화시설이 부족해 청소년들이 음악을 하고 싶어도 여건이 부족하다. 표출한 방법도 공간도 부족하다.
그래서 이 목사는 다음세대를 향한 비전을 품고 있다. 특히 포천지역에는 다문화가정 아이들이 많고, 이들이 문화와 교육에서 소외되지 않도록 도울 구상도 하고 있다. 카페는 더 성장해야겠지만, 다음세대 사역을 위한 전진기지와 같은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수용 목사와 박유혜 사모는 그저 방향만 생각하고 있을 뿐 하나님이 이끄시는 대로 순종하겠다는 각오이다.
“계획할 수도 없었고, 앞으로도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나아갈 생각입니다. 예수님께서 주린 자들의 배를 채워주신 것처럼, 내일도 우리는 이곳에서 굶는 주민분들을 채울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