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이 된 AI와 유전자 조작,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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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실이 된 AI와 유전자 조작, 우리는 여전히 ‘인간’일 수 있을까
  • 한현구 기자
  • 승인 2024.08.01 09:48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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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위임령 현황 보고서 해설 (8) 인간됨이란 무엇인가

10년이면 강산이 달라진다. 100년이면 그야말로 천지개벽이다. 기술의 발전과 인식의 변화, 문화의 확장은 정치·경제 전반은 물론 우리의 일상까지도 뒤바꿔놨다. 교회와 선교도 예외는 아니다. 약 2천년 전 로마가 닦아놓은 길을 따라 전해졌던 복음은 마차와 범선, 기차와 비행기에 몸을 싣더니 이제는 전 세계에 연결된 인터넷망을 타고 단 몇초만에 전달된다.

달라진 세상에서 교회의 모습과 복음을 전하는 방법이 2천년 전과 같을 수는 없다. 국제 로잔운동은 오는 9월 한국에서 열리는 제4차 로잔대회를 앞두고 오늘날 세계 기독교의 현실과 그에 맞는 선교 전략을 고민한 ‘대위임령 현황 보고서(The State of the Great Commission Report)’를 발표했다. 전 세계 최고의 선교 전문가들이 머리를 맞대 작성한 보고서는 10가지 질문을 통해 교회의 현주소를 진단하고 그에 맞춘 대안을 제시한다. 본지는 이번 호부터 10회에 걸쳐 로잔운동이 고민한 10가지 질문의 포장을 풀어 소개한다. <편집자 주>

 

‘튜링 테스트’라는 것을 들어보셨는지. 수학자이자 컴퓨터 과학자였던 앨런 튜링이 제안한 시험으로 기계가 인간 수준의 지능이 있는지를 판별하기 위해 쓰인다. 시험 과정은 이렇다. 질문을 맡은 사람 한 명과 두 명의 응답자를 준비한다. 그런데 이 응답자 중 한쪽은 인간이고 다른 한쪽은 컴퓨터다. 질의자가 질문을 던지면 둘 모두 나름의 답변을 내놓는다. 모든 응답은 화면상의 텍스트로만 나타나기에 어떤 쪽이 컴퓨터인지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다. 모든 질문을 끝낸 후 순수한 답변만으로 어떤 쪽이 컴퓨터이고 어떤 쪽이 인간인지 판별하기 어렵다면 튜링 테스트를 통과한 것이다.

튜링 테스트가 등장한 20세기 초만 해도 튜링 테스트를 통과하는 기계를 상상하기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생성형 AI 챗GPT는 사람보다 빠르고 자세한 대답을 ‘사람처럼’ 척척 내놓는다. 챗GPT가 작성한 기사나 보고서는 흡사 사람이 썼다 해도 의심을 사지 않을 정도다. 그런데 지난 5월 조지아대학교가 챗GPT를 대상으로 튜링 테스트를 실시한 결과 통과하지 못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이유를 들어보니 흥미롭다. 챗GPT의 대답이 너무도 완벽하고 인간보다 뛰어났기 때문에 오히려 AI임이 탄로 났다는 것이다.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잘나도 너무 잘나서 ‘인간미’가 없었던 셈이다.

마냥 웃고 넘길 일만은 아니다. 이제는 정말로 기계와 인공지능이 지적 수준에 있어서 만큼은 인간을 훌쩍 뛰어넘는 시대가 왔다. AI는 이제 목소리와 외형으로도 곧잘 인간 흉내를 낸다. 급속한 발달은 우리에게 ‘인간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인지’(What Does it Mean to Be Human?) 근본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던진다. AI와 생명공학, 그리고 성적 지향을 관통하는 한 가지 주제, 이른바 ‘인간됨’에 대해서 교회와 선교계에서도 고민해야 할 때다.

 

‘인간’이 무엇인지 질문하는 시대

이제는 너무 커버린 인공지능은 진작에 인간의 능력을 넘어섰다. 손글씨나 음성, 이미지를 인식하는 데 있어서 인공지능은 인간보다 탁월한 모습을 보인다. 성장 속도는 무서울 정도다. 인간의 능력을 0이라고 할 때, 언어 인식에 있어서 인공지능의 능력은 등장 당시인 2010년대 후반엔 –70 정도로 측정됐다면, 2020년엔 약 10의 능력을 갖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불과 2~3년 사이에 옹알이에 머물던 갓난아기가 성적 상위권의 수재로 자란 격이다.

발전하고 있는 생명공학 역시 인간이라는 존재가 과연 어떤 의미를 갖는지 고민하게 한다. 유전자 조작 기술은 이미 동식물을 대상으로 방대한 범위에 걸쳐 적용되고 있으며 인간에게까지 확장될 준비를 하고 있다. 인간은 다른 동식물과는 달리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창조된 특별한 존재라 믿는 기독교인에게는 난해한 윤리적 문제를 던진다.

이를 반영하듯 기독교인들은 유전자 조작 기술에 보수적인 입장을 취하는 비율이 높았다. 퓨리서치의 2020년 조사에 따르면 대부분의 국가에서 기독교인들은 무종교 인구에 비해 ‘유전자 특성을 변경하기 위한 유전자 조작은 적절하지 않다’고 답했다.

동성애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첨예하게 찬반이 대립하는 이슈 중 하나다. 특히 서구 사회는 점차 동성애가 잘못이 아니라는 인식으로 기울고 있는 분위기다. ‘LGBT+ Pride 2021’에서 국가별로 동성 결혼의 법적 승인에 대한 생각을 묻자 네덜란드에서는 84%가 찬성한다고 답했다. 조사 국가 중 찬성 비율은 아르헨티나(73%), 멕시코(63%), 남아프리카(59%), 미국(58%) 순으로 높았고 우리나라는 36%로 나타났다.

우리나라의 경우 세대별 격차가 특히 극명하다. ‘동성애가 사회에서 받아들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비율에서 한국은 가장 나이 많은 세대(50세 이상)와 어린 세대(18~29세)의 차이가 56%p로 세계에서 가장 양극화가 심한 것으로 드러났다. 스웨덴과 프랑스가 8%p, 미국이 18%p, 같은 동아시아권인 일본도 36%p 차이인 것과 비교하면 간극은 더 크게 느껴진다.

인간 능력을 0으로 설정했을 때 인공지능 능력의 발전 양상. 처음에는 인간에 미치지 못했던 인공지능의 업무 효율이 불과 몇년 사이에 놀랍도록 발전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AI는 도구, 어떻게 쓰느냐에 달렸다

AI 기술의 도입은 가히 혁명적이라 할 만하다. 귀찮은 연산을 대신 해주는 것에서 시작해 프로그램 개발 및 코딩, 콘텐츠 제작, 그림과 음악 같은 예술 영역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스며들어 있다. AI의 잠재력을 인식한 크리스천들도 복음 전파와 양육에 유용한 도구로 AI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먼저는 AI를 제자훈련에 활용할 수 있다. 교재 개발을 위한 자료를 수집하는 것부터 내용을 발전시키는 것과 디자인 요소까지 AI가 대신할 수 있는 영역이 상당하다. AI 기반 챗봇으로 종교적 질문에 성경 구절에 기반한 답변을 내놓거나 심지어 토론을 벌일 수도 있다. 성경을 연구할 때도 본문을 검토하고 특정 구절에 대한 해석을 제안하는 것도 가능하다.

다만 전제해둬야 할 것이 있다. AI가 아무리 많은 일을 한다고 해도 결국은 도구에 불과할 뿐 이를 사용하는 것은 인간이라는 점이다. 과장된 우려와는 달리 AI가 통제되지 않는 행동으로 인류에게 실존적 위협을 가할 가능성은 거의 없다. 크리스천이 해야 할 일은 AI가 윤리적인 방식으로 개발되고 사용하는 이도 책임감을 가질 수 있도록 이끄는 것이다.

로잔운동은 선교에 AI를 활용할 때 두 가지를 기억하라고 조언한다. 첫째로 AI와 같은 도구는 다른 모든 기술과 마찬가지로 교회가 세상에 진실을 선포하는 일에 도움이 되도록 사용해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런 도구를 활용해 복음을 충분히 접하지 못한 이들을 제자로 양육할 수 있다. 이때 기술이 종종 중립적인 도구로 머무르는 데 그치지 않고 우리 주변 세계와 우리의 인식을 정의하는 힘을 가질 수 있다는 점을 주의하고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는 기독교 복음의 전파는 단순히 더 많은 지식을 획득하고 전달하는 것으로 아님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선교는 단순히 인터넷에서 파일을 업로드하고 다운로드하는 방식으로 이뤄지지 않는다. 복음은 인간 존재와 하나님 사이의 개인적 만남에 초점이 맞춰진다. AI가 도움을 줄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선교와 대위임령 성취가 AI 자동화 시스템으로 대체될 수는 없다는 것이다.

각 국가에서 유전자 조작에 동의하는 종교인 비율.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인들은 무종교인에 비해 유전자 조작 기술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각 국가에서 유전자 조작에 동의하는 종교인 비율. 기독교인을 비롯한 종교인들은 무종교인에 비해 유전자 조작 기술에 보수적인 태도를 보인다.

기독교 가치관 거부하는 트랜스휴머니즘

기술의 발전은 인간이라는 개체의 한계를 뛰어넘어보려는 욕심을 품게 했다. 사이보그 기술과 나노 기술, 유전자 조작 등 각종 기술을 활용하면 인간의 지능과 육체의 한계, 심지어 노화와 죽음의 문제까지도 정복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마치 하늘에 닿고자 탑을 쌓았던 바벨탑이나 불로초를 찾아 헤맸던 진시황의 모습과 같다고나 할까. 기술로 인간을 개조해 초월적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상을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이라 부른다.

일반적으로 트랜스휴머니즘은 전통적 의미의 종교를 거부하고 신의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불완전하고 원죄를 지닌 인간론에도 동의하지 않는다. 우리가 연약하고 제약으로 가득한 육체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말하는 ‘구원’이다. 죄로 인해 인간이 스스로를 완전하게 만들 수 없고 오직 하나님의 전적인 은혜가 필요하다는 기독교의 교리와, 인간과 기계를 융합해 이른바 ‘사이버 불멸’을 누리며 인간이 완전해질 수 있다고 말하는 트랜스휴머니즘은 공존하기 쉽지 않다.

교회는 트랜스휴머니즘이 꽤나 매력적인 유혹을 전하고 있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비단 진시황의 예가 아니더라도 영생을 누리고자 하는 인간의 욕구는 예로부터 끊임없이 이어져 왔다. 지금도 젊음을 유지하는 방법에 목을 매는 사람들이 ‘영원히 살고 싶지 않느냐’는 트랜스휴머니즘의 유혹에 흔들리지 않으리란 보장은 없다.

로잔운동은 트랜스휴머니즘에서 말하는 ‘죽음과 고통에서의 승화’라는 주제를 기독교 관점에서 풀어낼 것을 제안한다. 트랜스휴머니즘을 중요하지 않은 위협으로 치부하거나, 혹은 그것에 대해 너무 흥분하는 태도는 모두 적절하지 않다. 사실 교회는 언제나 기독교적 가치관을 위협하는 사상과 권력의 도전을 받아왔다. 언제나 그래왔듯 복음의 핵심에서 중심을 잃지 않고 우리가 믿는 바를 담대히 전하는 용기가 오늘날의 크리스천들에게도 요구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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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쁨은 2024-08-06 23:48:35
본 기사에서도 언급했듯이 트렌스휴머니즘은 창조질서에 도전하는 사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