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시고 “심히 좋다!”고 경탄하셨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피조세계를 파괴하고, 멸종에 이르게 하는 끔찍한 죄를 짓고 있습니다. 산업혁명 이후 전 세계적으로 멸종이 급증하여, 지금은 생명 다양성이 파괴되는 대멸종 시대로 접어들었습니다.
유엔사무총장 안토니오 구테흐스(Antonio Guterres)는 2022년 기후정상회의에서 “지구 온도가 계속 올라가고 있다. 그리고 우리 행성 지구는 기후 재앙을 돌이킬 수 없는 티핑 포인트(균형을 깨뜨리는 극적인 변화의 시작점)를 향해 빠르게 다가가고 있다”고 경고하며, “우리는 기후지옥으로 가는 고속도로에서 가속 패달을 밟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2023년 기후정상회의에서 그는 한 톤 더 높여 “인류가 지옥의 문을 열었다”며 우리가 “위험하고 불안정한 세상을 향하고 있다”고 준엄하게 경고했습니다. 그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분별하는 가장 날선 예언자적 목소리를 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깨어나 현실을 직시하며, 생태적 절망의 시대에 희망을 노래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환각상태에서 깨어나, 신음하는 피조물과 함께 하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을까요? 우리는 요한 사도가 말한 “말과 혀가 아닌 행함과 진실함”(요일 3:18)에서 생태적 희망을 발견합니다. 행함과 진실함으로 초대하는 예수님의 비유 한 자락을 들어보십시오.
강도 만난 자의 이웃
율법교사가 예수님께 질문을 합니다. “스승님, 제가 무엇을 해야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까?” 되묻는 예수님께 그는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라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그에게 “네 대답이 옳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말씀하셨습니다. 율법교사는 “누가 내 이웃입니까?”라고 되묻습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비유 하나를 들려주셨습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가는 길에 강도를 만났다. 그는 강도들에게 가진 것을 다 빼앗기고 맞아 거의 죽을 지경에 이르렀다. 마침 그 길을 지나가던 제사장이 그를 보았지만 그냥 지나갔다. 레위인도 그를 보고 지나쳤다. 얼마 후 사마리아인는 그를 보고 측은한 마음이 들어 그에게 달려가 상처를 치료하였다. 강도 만난 사람을 나귀에 태워 주막에 들러 보살펴 주었다.”
우리는 이 대화와 비유 말씀을 통해 선택과 행동을 요청받습니다. 강도를 만나 신음하는 사람을 보고 그냥 지나가시겠습니까? 아니면 가서 이웃이 되어 주겠습니까? 제사장과 레위인은 강도 만난 자를 보았으면서, 왜 그를 치료하지 않고 지나갔을까요? 그들은 성전에서 하나님을 섬기며 율법을 지키면서 산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친 사람을 돕다가 죽기라도 한다면 율법을 어기는 것이 되었기에 그냥 지나쳤을 것입니다. 질문을 했던 율법교사도 비슷한 입장이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라고 묻고, 율법교사는 “자비를 베푼 사람”이라고 응답합니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그를 보고 가엾은 마음이 들어 가까이 가서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를 붓고 싸매어 주고 자기 나귀에 태워 여관으로 데리고 가서 간호를 해주며 행동한 사마리아 사람입니다. 예수님께서 율법교사에게 말씀하셨듯이, 오늘 여러분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 10:37)고 말씀합니다.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자는 누구입니까? 강도 만난 자처럼 목소리도 내지 못하고, 방어력도 없이 죽게 된 이들은 누구입니까? 이 질문에 올바르게 응답하기 위해서, 우리도 이웃의 개념을 모든 피조물로 확장시켜야 합니다.
신음하는 피조물의 이웃되기
예수님은 비유를 통해 강도 만난 자의 진정한 이웃은 사마리아 사람임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웃의 울타리를 인간종을 뛰어넘어 모든 피조물로 확장시킬 때 생태적 희망이 있습니다.
성경과 전통에서 피조물은 단순히 물질이 아닌 우리의 이웃임을 보여줍니다. 하늘과 땅 그리고 존재하는 만물이 부모, 형제, 벗이라는 동양의 가르침은 큰 울림으로 다가옵니다. 바울은 좀 더 나아가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가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려졌나니”(롬 1:20)라고 증언합니다.
우리 시대의 강도 만난 이웃은 신음하는 피조물이 분명합니다. 우리의 이웃은 파괴되는 산림, 독성 물질로 오염되는 바다, 멸종을 눈앞에 두고 있는 많은 생명종, 주거지 파괴로 인해 생긴 기후 난민들입니다. 피조세계를 파괴하는 것은 하나님의 언약 당사자를 살해하는 신성모독이요, 우리의 이웃과 형제자매를 괴롭히며 죽이는 행위입니다.
구상 시인은 노년에 “두 이레 강아지만큼 은총에 눈을 뜬다”고 하면서 눈 뜨니 세상은 은총으로 가득하고, 모든 것이 새롭고 소중하고 아름답다고 창조의 경이로움을 노래합니다. 그 경이로운 세상을 우리도 눈 뜨고 볼 수 있을까요? 그 경이로운 세상을 눈 뜨고 볼 수 있다면, 우리는 신음하는 피조물의 이웃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열린 기후지옥의 문을 닫고, 하나님이 보시기 ‘심히 아름다운’ 지구공동체를 돌보는 일에 생태적 헌신을 해야 합니다.
당신의 마음 속에 피조세계에 대한 아무리 큰 사랑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행함과 진실함으로 실천하지 않으면 소리 나는 구리와 울리는 꽹과리에 불과합니다. 사랑은 말과 혀가 아닌 당신의 진실한 손과 발 그리고 온 몸으로 나무를 심고, 생태적 전환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생태위기 시대를 함께 걷는 그리스도인 여러분, 행함과 진실함으로 생태적 희망이 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