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세아를 배신한 고멜의 행동이 유별나긴 하지만 당시 이스라엘의 영적, 도덕적 상황에서 충격적인 일은 아니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을 다스린 여로보암 2세는 악하지만 유능했으며, 그의 통치하에 이스라엘은 한껏 상승한 국력을 즐기고 있었습니다. 군사력 증강은 접경지역의 징발과 통행세 수입으로 이어졌고, 활발한 무역을 통해 사람과 돈, 물자가 흘러들었습니다. 수도 사마리아는 현대에 발굴된 호사스러운 부장품들이 증언하듯 부와 사치를 자랑하는 국제도시로 행세하고 있었습니다. 사치가 타락을 부르는 것은 고금을 가리지 않습니다. 시작부터 율법의 기준을 어기며 내리막을 걷던 북이스라엘의 신앙은 이제 죄악으로 찌들어 마비 상태에 있었습니다. 고상하고 존경받는 예언자 남편이 그녀를 버리지 않고 끝까지 사랑해준 것이 놀라웠을 뿐, 고멜의 행동 자체는 놀랍지도 않은 시대가 되었던 것입니다. 황망함 속에 호세아가 결연히 외쳤습니다. “음란한 세대여,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시오. 하나님께서 당신들을 버리시는 것이 두렵지 않소? 하나님이 당신을 ‘긍휼함을 받지 못한 자,’ ‘내 것이 아닌 백성’이라고 부르시는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말이오?”라고 말입니다. 상황은 더 악화됩니다. 음란한 여인이 음란한 자녀를 낳았습니다(4절). 그 어미가 진실한 사랑을 팽개치고 거짓된 사랑을 좇은 결과입니다. “그들의 어머니는 음행하였고 그들을 임신했던 자는 부끄러운 일을 행하였나니 이는 그가 이르기를 ‘나는 나를 사랑하는 자들을 따르리니 그들이 내 떡과 내 물과 내 양털과 내 삼과 내 기름과 내 술들을 내게 준다’ 하였음이라”(5절) 여인의 말에는 위선의 시도조차 없습니다. “사랑이 밥먹여주냐?”라는 비아냥도 최소한 사랑의 가치를 인정하는 말입니다. “사랑이 제아무리 좋아도 당장 내가 필요한 것은 다른 것이야”라는 일말의 변명과 항의가 섞여 있는 셈인데, 여인은 내 사랑은 내 물주라고 잘라 말합니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할만치 망가진 이 여인은 애인들을 따라나서지만, 결국 아버지가 누구인지도 불분명한 자식들을 거느린 채 버림받게 됩니다. 놀랍게도 그녀가 버리고 떠났던 남편이 그녀를 찾아 다시 데리고 와 극진히 사랑합니다(3:1~3).
호세아가 고발하는 음란한 여인과 음란한 자식은 영적으로 곤두박질하는 이스라엘의 모습을 가리킵니다. 입으로는 하나님, 하나님 외치면서 내심으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권력을 믿고 재물을 의지하며 살아가는 이스라엘은 남편이 벌어준 돈을 정부에게 갖다 바치는 음녀와 다를 바 없다는 무서운 질책입니다. “그들이 바알을 위하여 쓴 은과 금도 내가 그들에게 더하여 준 것이거늘 그들은 알지 못하는구나”(8절) 성전에 와서 제사를 드리고 찬양을 부르지만 그들의 가치관은 하나님을 믿지 않는 이방인들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그들의 예배는 단지 죄책감을 달래고 스스로 면죄부를 주는 절차에 불과했고, 그들이 내심으로 숭앙하는 것은 하나님과는 거리가 먼 세속의 것들이었습니다. 그러나 마침내 하나님의 진노가 임하는 날, 그들이 의지하던 것들은 그들을 돕지 못할 것입니다.
진노의 날을 감지한 선지자는 임박한 재난과 고통을 온 몸으로 경고하며 호소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심판 앞에 선 세대. 음란한 후손을 낳는 음란한 세대. 그것이 우리 모습은 아닐지요? 신자의 외양은 갖추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보다 세상을 더 믿고 따르는 군상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보지 못한다면, 우리도 의지하던 것들이 우리를 배신하는 경험을 할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불의의 재물은 무익하여도 공의는 죽음에서 건지느니라”(잠 10:2)
백석대·구약신학
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 (125) - “이는 그들이 음란한 자식들임이니라”(호 2:4)
저작권자 © 아이굿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