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머니께서 들려주신 ‘울보 성수’ 얘기. 나는 네 살 때부터 할머니 등에 업혀 새벽기도회에 나갔단다. 워낙 울보라, 집에서도 울고 밖에서도 울었단다. 아무리 달래도 울음을 그치지 않자, 할머니께서 목사님에게 “우리 성수 좀 울지 않게 기도해 주세요.”라고 부탁하셨단다.
목사님께서는 울음을 그치게 하는 묘수(妙手)를 아셨다. 나를 안고 숲속 묘지로 가셨다. 햇빛을 못 받아 잔디 한 포기 없이 푹 꺼져버린 묘지. 어둑어둑한 새벽 미명(微明)에 으스스한 묘지. 금방이라도 귀신들이 툭 튀어 나올 것 같았다. “하나님, 성수가 다시는 울지 않게 해 주세요.” 목사님의 기도는 역시 묘수였다. 나는 울음을 뚝 그치고 다시는 울지 않았단다.
요즈음 교회 상황을 볼 때도 가슴이 아프지만, 최근 정치 상황을 볼 때는 하늘이 무너지고 땅이 꺼지는 것 같다. 쫓겨 도망하다가 가파른 절벽에 바닥을 내려다보니 간담이 서늘하다. 교회가 회복되어 부흥만 한다면! 우리나라가 자유민주주의 정체성만 지킬 수 있다면! 간절한 소원으로 간구하지만, 처절한 절망과 오싹한 공포가 몰려오는 까닭이 무엇일까.
뇌리에 치고 들어와 맴도는 성경 말씀이 있었다.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안타깝게 간구하고 성경을 펼쳤다. 에스겔 37장의 해골 골짜기.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라 있었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정신이 번쩍 들게 하는 질문. 하나님께서 내게 던지시고 계시는 것 같다.
에스겔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아이쿠, 저걸 어쩌지?’ 해골 골짜기가 푹 꺼진 묘지와 겹치고, 에스겔이 4살짜리 울보 소년과 겹쳤다.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주 여호와께서 이 뼈들에게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가 생기를 너희에게 들어가게 하리니 너희가 살아나리라” (겔 37:4-5).
아무리 외쳐도 반응 없는 ‘해골 청중’에게 말씀을 외치라? 무슨 소용이 있을까? 그래도 에스겔은 순종했다. 외쳤더니 이 뼈, 저 뼈가 들어맞아 연결되었다. 하나님의 명령대로 ‘생기’를 향해서도 대언했다. “생기야 사방에서부터 와서 이 죽음을 당한 자[들]에게 불어서 살아나게 하라” (겔 37:9).
말씀과 생기로 마른 뼈들이 살아나서 극히 큰 군대가 되었다. 죽음의 골짜기가 생명의 골짜기로, 절망의 골짜기가 소망의 골짜기로, 공포의 골짜기가 환희의 골짜기로 변했다.
그동안 누차 강조해 온 대로 성경과 성령으로 부흥이 일어난다. 목마르지 않다는 게 문제다. 목말라야 샘을 판다. 절박해야 절실하고, 절실해야 갈구한다. 부르짖어야만 해골 골짜기가 보인다. 가짜 뉴스를 하도 많이 들어 진짜 복음은 아예 듣지 않는 해골 청중! 안타까워 견딜 수 없다. 속이 타들어간다. 어떻게 듣게 하고, 어떻게 살려 낼까?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미국의 제1차 대각성운동이 중지되었다. 신학생이 인본주의/합리주의 학문에 취해 마음이 싸늘해졌다. 마음이 싸늘한 설교자가 교인들의 마음을 싸늘하게 만들었다. ‘싸늘한 신학’이 ‘싸늘한 설교’로 ‘싸늘한 시체’를 만들어 버린 것이다.
안티-크리스천 캠퍼스는 그야말로 마른 뼈 골짜기였다. 교회와 복음을 등진 학생들은 ‘해골 청중’이었다. 조나단 에드워즈의 외손자 티모씨 드와이트(Timothy Dwight) 예일대 총장은 해골 골짜기에서 예수생명의 복음을 전했다. 학생들에게 “성경의 진리를 자유롭게 공격하라.”고 도전한 다음 채플에서 “성경과 복음만이 살길이다.”는 시리즈 말씀으로 응전했다.
“불신 철학의 본질과 위험.”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인가?” 이런 강의 설교를 통해 이신론(理神論)과 유물론(唯物論)을 논박했다. “토해낸 찌꺼기” 같은 서적들을 마치 보석단지처럼 여기던 학생들이 말씀을 통해 성령의 생기를 체험했다. ‘해골 청중’이 ‘강한 군대’로 살아났다.
“이 뼈들이 능히 살겠느냐?” “주여, 이 뼈들을 말씀(성경)과 생기(성령)로 살려 주옵소서!”
‘부흥의 문’이 막히기 전에 울부짖자. 해골 청중이 강한 군대로 살아날 때까지 울부짖자. 성령의 능력으로 예수생명의 복음을 선포하자. “마른 뼈들아, 말씀을 듣고 생기로 살아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