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중고등학생 중에 수업 시간에 잠을 자는 아이가 네 명 중 한 명 꼴이라고 한다. 선생님들이 얼마나 힘이 들까. 교육대학교 지원자가 급격히 줄어드는 한 원인이 아닐까 싶다. 물론 인구가 줄어드는 것이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교수 생활을 하면서 수업 중 조는 학생은 봤어도 아예 자는 학생은 거의 보지 못한 것 같다. 문제는 스마트폰을 보는 학생들이다. 이들은 교수가 들어와도, 다른 동료가 들어와도 쳐다보지도 않고 스마트폰만 들여다본다. 얼굴 대신 ‘정수리’만 보여준다.
수업 중 스마트폰만 들여다보는 학생들이 보일 때에는 무시당한다는 느낌이 들어 불만을 표하기도 한다. 한번은 학생들에게 좀 싫은 소리를 했다. 그런데도 별 반응도 없고, 스마트폰 보는 것도 여전했다. 나중에 조교의 말을 들어보곤 후회를 하게 됐다. 외국인 학생들이, 한국어를 모르니 강의 내용을 번역해서 듣느라 그랬던 것이다. 그렇다면 청각장애인도 그리 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소리를 텍스트(문자)로 바꿔주는 앱을 사용할 테니까. 설교를 하시는 분들도 이제는 설교 중 스마트폰 들여다보는 회중을 좀 이해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오해를 많이 하면서 살아간다. 어느 기차 안에서 아이가 심하게 울자 승객들이 짜증을 내기 시작했다. 정작 아이 엄마는 창 바깥만 내다 보고 있었다. 잠시 후 옆자리 부인이 아이를 안고 열차 사이 공간으로 나갔다. 이를 본 승객들이 그녀를 보며 불평을 했다. 그러자 그 부인이 승객들을 바라보며 한마디 했다. “내 아이가 아닙니다. 아이 엄마가 듣지 못하는 청각장애인인 것 같아서 내가 아이 달래려고 나가는 중입니다.” 그러자 열차 안은 숙연해졌다.
어느 여학생이 복잡한 시장 골목을 걸어가고 있었다. 그 뒤를 작은 트럭 한 대가 난폭하게 운전을 하며 달려오고 있었다. 경적을 여러 번 울리면서. 그럼에도 여학생은 비키지 않고 길 가운데로 걸어갔다. 그 순간, 참다못한 운전자가 학생 바로 옆 틈으로 차를 몰았다. 다행히 한 남학생이 뛰어들어 여학생을 밀쳐냈다. 그런데도 여학생은 상황을 모르는 듯 자신을 밀쳐낸 남학생을 향해 오히려 화난 표정을 보였다. 고마워할 줄 알았던 남학생은 화를 내며 따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내 그 여학생이 청각장애인인 것을 알게 됐다. 우리 모두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어딘가 약한 구석이 있는 불완전한 사람이다.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다. 서로의 약점을 이해해야 더불어 살아갈 수 있다.
‘나의 언어’ 대신
‘너의 언어’를 사용하자
얼마 전 일본 오키나와를 다녀왔다. 여행 온 우리 국민들을 곳곳에서 볼 수 있었다. 그래서인지 슈퍼마켓 같은 곳에는 일본어와 한국어를 병기한 안내판이 많아 편했다. 일본은 현금을 많이 사용하는데, 이방인 입장에서는 동전 헤아리는 게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런데 슈퍼마다 동전 헤아리는 기계가 있다. 물건값을 먼저 계산하고, 내가 갖고 있는 한 줌의 동전을 모두 쏟아 넣으면 물건값을 차감한 거스름 동전이 나온다. 이방인에게는 참 편리한 기계다.
사람이 성숙해지면 상대방의 입장에서도 생각해볼 줄 알게 된다. 나이와 관계 없이. 이른 바 ‘역지사지(易地思之)’는 상대방에 대한 ‘인정(認定)’에서 시작된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해야 그의 필요도 생각하게 된다.
나갈 때 편리하도록 손님의 신발 방향을 바꿔놓는 것, 손님이 집기 편한 쪽에 수저를 놔주는 것이 그것이다. 역지사지를 잘 하는 사람이 바로 친절한 사람이다.
교통 표지판이나 공공 게시물, 제품 안내서 등을 보면, ‘나의 언어’로 표현한 것이 많아 불편하다. 역지사지를 잘 하는 사람은 ‘나의 언어’ 대신 ‘너의 언어’를 사용한다.
‘버스 정거장’, ‘표 파는 곳’, ‘쓰레기 분리 수거’ 대신 ‘버스 타는 곳’, ‘표 사는 곳‘, ’쓰레기 분리 배출’이라고 한다. 층수를 가리키는 글자가 큰 엘리베이터를 가끔 타게 되는데 노안(老眼)의 노인들에게는 얼마나 편리한지 모른다. 그런데 화장품이나 전자제품의 사용 설명서는 왜 그리 글자가 작은지...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실까?” 이 책은 내용도 좋지만 제목도 훌륭하다. 내가 누군가의 입장에 서봐야 내가 어떻게 해야 할지 답이 나온다.
“내가 새 교우라면”, “내가 청년이라면”, “내가 학생이라면”, “내가 목회자라면”, “내가 교인이라면”, “내가 부모라면”, “내가 자녀라면”, “내가 아내라면”, “내가 남편이라면” 이런 가정법이 역지사지를 하게 해준다.
역지사지가 이웃 사랑의 열쇠다!
(사)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