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화대교를 건너 5분이 채 걸리지 않았다. 2차선 시골 도로로 빠져 조금 달리니 네비게이션이 야트막한 야산으로 인도한다. 사회복지법인 ‘예닮’(대표이사:김종호 목사)은 고즈넉하게 그 안에 자리하고 있었다. 중증장애인 거주시설이라고 들었던 터라 규모가 이 정도로 클 줄은 몰랐다. 그러면서도 깔끔하고 단정한 느낌이다. 야산 바로 아래에는 철책선이 바다를 막고 있었다.
어떻게 이곳에 장애인들이 머물 터전을 세울 수 있었던 걸까. 일단 바다 건너 북녘땅에서 불어오는 겨울바람이 매서워 발걸음 재촉한다. 사회복지법인 예닮 설립자이자 대표이사 김종호 목사가 반갑게 맞아준다. 책장 한켠에 작년 12월 한국교회총연합 행사에서 자원봉사대상 대통령상을 받은 아빠를 축하하는 아들·딸의 소박한 화환 장식이 눈길을 끈다.
우리는 ‘예닮’이니까요
“전국에서 10번째 정도로 와상장애인이 많을 겁니다. 중증이 그만큼 많습니다. 51명의 장애인들이 있고, 45명 직원들이 함께하고 있고요. 직업재활시설 종사자를 포함해 현재 장애인 30명이 출퇴근하고 있습니다. 조금 이따 우리가 만든 빵 한번 먹어보세요. 최고입니다.”
모든 시설의 이름은 ‘예닮’이다. 예수님을 닮은 존귀한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예닮’에서 거주하는 장애인들은 모두 중증이다. 비교적 가벼운 장애인을 선호하는 시설들이 많다는 걸 아는 터라 무척이나 의아했다.
“우리가 처음 개원할 때 서울, 경기, 인천 등지 장애인 전원을 받았거든요. 반대도 일부 있었지만 저는 가리지 않았습니다. 와상장애인, 심각한 자폐까지 우리 시설에서 수용하기로 했습니다. 우리가 ‘예닮’인데… 다 받아야 한다고 설득했죠. 전국에서 2% 이내에 드는 중증장애인 시설입니다.”
거주 장애인 중 5명만 빼고 모두 기초생활수급자일 정도로 경제적 사정이 좋지 않다. 연고가 없는 장애인이 10명 중 7명 이상이다. 다른 시설에서 받아주기 힘든 장애인들을 처음부터 ‘예닮’이 가족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예닮’을 탐방하며 인적 구성과 인프라, 종사자 태도, 장애인들의 표정까지 살펴봤다. 중증장애인이 많은 것에 비해 아주 체계적이고 단단하게 운영되고 있었다. 직원기숙사까지 갖추고 있는 시설은 거의 없다. 건물 뒤편에는 중증장애인들도 얼마든지 산책할 수 있도록 데크 산책로가 조성되어 있다. ‘예닮’에 입소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조심스럽게 물었다.
“입소문이 나면서 전국에서 문의가 오는데 저희가 죄송하죠. 더는 수용할 수가 없습니다. 저희는 우리 식구들의 일생을 책임집니다. 한 분이 하나님 곁으로 가면 다른 분이 들어올 수 있거든요.” 걷다 보니, 이곳에서 별세한 이들을 기억하는 수목 몇 그루가 보였다.
포기할 줄 모르는 김 목사
50억, 100억을 출자해도 사회복지법인 설립 허가를 받는 건 쉽지 않다. 국가 재정이 투여되기 때문에 무척이나 까다롭다. 그런데 ‘예닮’은 사회복지법인이다. 김종호 목사가 처음 이곳에 장애인 시설을 만들겠다는 꿈을 품었을 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김 목사는 초등학교 5학년 때 주의 종이 되겠다고 서원하고 신학교에까지 진학했다. 1988년 졸업 즈음, 소외된 이웃을 향한 목회 비전을 세웠다. 서울올림픽 이후 열린 패럴림픽 중계를 보면서 장애인이 눈에 들어왔다. 당시 장애인에 대한 인식은 형편없었다. 집에 방치되는 장애인들이 너무나도 많았다.
여의도순복음교회 부교역자로 시무하게 되면서 처음부터 장애인 부서를 자원했다. 다른 교역자들은 선호하지 않지만, 그의 소명을 찾아 갔다. 6년 동안 장애인대교구에서 쌓았던 경험이 지금까지 장애인 사역을 하는데 밑거름이 됐다.
“같이 먹고, 같이 웃고, 같이 우는 것이 장애인 사역이었죠. 같이 있어 주면 되는 것, 필요를 채워주면 되는 것이 제 목회 철학이 되었던 시기입니다. 그러다 2003년 개척 지원서를 내고 2004년 개척학교를 수료했고, 강화도에서 지금까지 목회하고 있습니다.”
여의도순복음교회에서 사역하면서 2년 반 동안 시간만 나면 부지를 찾아 강화도를 헤맸다. 현재 부지를 발견하고 땅주인에게 전화했다. 단칼에 거절이었다. 어촌계 마을주민들도 완강했다. 혐오시설은 허가하지 않겠다는 지자체의 약속까지 있었다. 포기는 없었다. 젊은 목사가 기특했던지 결국 나이 많은 땅 주인은 허락해주었다.
하지만 땅은 맹지였다. 진입로를 만들어야 할 땅 주인을 설득하는데 6개월이나 걸렸다. 지금은 매달 장애인들을 위해 두유도 보내줄 정도로 좋은 이웃이 됐다.
“하지만 넘어야 할 산이 또 있었습니다. 시설 허가를 내주지 않는 겁니다. 처음에는 무작정 문화체육관광부를 찾아가 장애인 시설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어이가 없는지 웃으면서 인천시청을 찾아가라고 알려주더라고요.”
인천시는 시설 허가는 안 된다는 말만 반복했다. 김 목사는 항상 젊잖은 태도를 잃지 않았지만 결코 포기를 몰랐다. 1년 반을 시청을 드나들던 차, 어느날 시청으로 들어오라는 전화를 받았다.
“이게 무슨 일인가요. 땅이 있는지 묻고는 15억 4천만원 예산까지 지원하겠다는 겁니다. 개인에게 지원하기엔 너무 큰 예산이라, 사회복지법인 설립까지 가능하도록 해주었습니다. 하나님이 하신 것이라 고백할 수밖에 없었죠.”
강화군에서도 건축허가를 내주었다. 사회복지시설 건축허가를 거의 2년 동안 내주지 않던 군청이 정책을 바꿨다. 군수와 면담하면서 진심이 통했다. 지역에서는 청와대와 연줄이 있다는 소문까지 돌면서 힘을 써달라는 사람들이 무수히 찾아왔다.
“31년 사역하면서 더뎌도 정직하게 하려고 했습니다. 편법은 단 한번도 없었어요. 그런 예닮을 지자체에서도 긍정적으로 봐주시는 것 같습니다. 한 번 더 놀라운 역사가 있었죠. 정부 예산을 받아 직원들을 위한 기숙사까지 지었습니다. 은혜 아니면 설명할 길이 없습니다.”
“하나님이 길을 다시 여실 것”
사회복지법인 예닮이 이토록 성장할 수 있었던 든든한 배경이 아주 없었던 건 아니다. 장애인 시설을 시작하면서 김종호 목사가 먼저 개척한 예은순복음교회가 있었다. ‘예닮’과 동행하기 때문에 성도들 대부분은 사회적 약자들을 돌봐야 한다는 사명감이 충만하다. 외진 곳에 있다 보니 장애인 사역에 헌신할 각오가 되어 있는 성도들이 출석하고 있다.
교회 재정의 80%는 선교와 돌봄을 위해 흘려보낸다. 물론 ‘예닮’을 가장 크게 섬기고 있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개척교회와 선교단체, NGO 할 것 없이 국내외 25곳을 후원하고 있다. 개척 때부터 선교는 교회의 사명이었다.
김 목사는 ‘예닮’을 개원할 때부터 응원을 아끼지 않았던 여의도순복음교회와 이영훈 목사에게도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이런 든든한 기도와 후원의 동역자들이 있었기 때문에 ‘예닮’의 발걸음에 힘이 실릴 수 있었던 것이다. 예닮은 베이커리를 통해 장애인들의 직업 재활에도 힘을 쓰고 있다. 작년에는 장애인들에게 급여를 주고도 1천만원 가량 수익까지 났다. 강화교육청과 인천시교육청과 협약을 맺고 학교 체험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특히 강화에서 생산되는 밀로 만들고 첨가물이나 방부제를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가격까지 저렴하지만 대신 유통기한이 짧은 것이 아쉽다. 건강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다.
김 목사와 함께 들른 1층 제빵시설과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베이커리 카페에서 장애인들이 스스럼없이 맞아준다. 김 목사가 침이 닳도록 자랑했던 강화 우리밀로 만든 빵과 카페라떼 한잔이 나왔다. 제빵 기술과 바리스타 자격증을 가진 장애인들이 직접 만든 것이다. 빵과 음료를 들며 나누는 대화 속에서 ‘예닮’을 향한 감사와 비전이 쏟아져 나온다.
“17년을 한결같이 달려올 수 있는 건, 100번을 말해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개원할 때 입소한 30~40대가 이제 50대가 되어갑니다. 우리는 이제 장애인 요양원을 두고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막에 길을 만드시는 하나님께서 길을 열어주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