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니엘 4장과 5장은 다른 시대, 다른 왕들의 이야기이지만 주제와 전개가 긴밀하게 연결되며 짝을 이루고 있습니다. 4장에서 느부갓네살은 권력에 도취해 교만한 말을 내뱉다가 왕권을 박탈당하고 짐승과 다름없는 처지로 몰락합니다. 5장의 주인공인 벨사살은 느부갓네살에게 닥쳤던 일들에 대해 무지 혹은 무시로 일관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탈취한 거룩한 그릇들에 술을 부어 잔치를 벌이던 그는 문득 눈앞에 나타난 심판의 선언문에 두려워 떨고, 곧바로 심판의 칼날이 그에게 들이닥치고 맙니다. 결국 이 두 왕의 이야기는 인간의 교만을 심판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알리고 돌이켜 그분 앞에 겸손히 행하도록 촉구한다는 점에서 예언서의 중심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선한 것이 무엇임을 네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네게 구하시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미 6:8)
귀족 천 명을 초대한 벨사살의 잔치는 대제국 바벨론의 기준으로도 지나치게 화려했습니다. 주흥에 겨운 왕이 생각해낸 새로운 여흥이 예루살렘 성전의 기명으로 술을 마시는 것이었고, ‘귀족들과 왕후들과 후궁들’은 깔깔대며 그 그릇들로 술을 마셨습니다(2~3절). 술을 마신 후 그들이 한 일은 놀랍습니다. “그들이 술을 마시고는 그 금, 은, 구리, 쇠, 나무, 돌로 만든 신들을 찬양하니라”(4절) 주색잡기라는 말이 가리키듯 취흥이 질탕한 환락으로 이어지는 것은 놀랍지 않지만, 이들이 만취상태에서 신들을 찬양했다는 것은 이들의 ‘신앙’이 어떤 것인지를 짐작하게 해 줍니다. 우리 하나님은 화를 쉽게 내시지 않지만, 그분이 진노하시면 견뎌낼 자가 없습니다. 벨사살의 신성모독 행위는 하나님의 진노를 불러들이는 심판의 피뢰침 노릇을 하고 말았습니다. 우상에게 바쳐진 찬양이 마치자 난데없이 사람의 손가락이 나타나 연회장 벽에 글씨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모습이 어찌나 기이했던지 왕이 공포에 질려 사색이 되고 ‘무릎이 서로 부딪칠’ 지경이 되었습니다(5~6절). 왕이 즉시 술사들을 불렀지만 아무도 그 뜻을 알지 못했습니다. 선대의 일을 알던 대비가(개역개정은 ‘왕비’로 번역, 10절) 왕에게 나아가 다니엘을 추천하니 다니엘이 다시 한 번 모두의 주목을 받으며 왕 앞에 섭니다. 그의 해석은 단순명확했습니다. 바벨론 술사들이 해독하지 못했던 손가락 글씨는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 즉 “헤아리고 헤아려보니 무게가 모자라 나뉘어지리라”는 뜻이었습니다. 비교적 평이한 아람어이지만, 문맥이 없이 던져진 이 구절들의 참뜻은 오직 다니엘만 해석할 수 있었습니다. 대비가 말한 대로, 다니엘에게는 하나님의 영이 충만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계시가 주어진 것은, 느부갓네살이 당했던 일을 잘 알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몸을 낮추지 않고 성전 그릇으로 술을 마시고 ‘보지도 듣지도 알지도 못하는’ 우상들에게 절하면서 ‘왕의 호흡을 주장하시고 왕의 모든 길을 작정하시는 하나님’은 무시한 벨사살의 죄를 묻기 위해서였습니다(23~24절). 벨사살 왕은 애써 침착을 유지하며 약속했던 보상을 다니엘에게 내렸지만, 정작 회개할 기회도 얻지 못하고 그 밤으로 메대 왕 다리오가 이끈 병력에게 목숨을 뺏기고 맙니다. 고대 근동의 패권이 바벨론에서 페르시아 제국으로 넘어가는 이 엄청난 세계사적 사건의 본말은, 제국 간의 격돌이 아닌 하나님의 주권행사입니다. 이것이 다니엘서를 ‘기적 이야기’와 ‘묵시문학’을 넘어 예언서로 읽어야 하는 이유입니다.
오늘 우리도 역사의 행간에서 하나님의 뜻과 손길을 읽을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 백성이고 ‘그 책’의 사람들이니까요.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엡 5:17)
백석대·구약신학
유선명 교수의 예언서 해설 (117) - “기록된 글자는 이것이니 곧 메네 메네 데겔 우바르신이라” (단 5: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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