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기독교 초기 목회자에 대한 발굴활동은 활발한 반면 평신도 지도자에 대한 연구는 상당히 미진한 편이다. 낙후된 평신도지도자 연구 중 그나마 눈에 들어오는 인물 한명이 바로 노병선 선생이다. 그는 이승만박사와 함께 배재학당에서 공부하며 졸업동기생으로 교분을 쌓았다고 한다.
노병선 선생은 한국인으로는 처음 ‘기독교신앙변증서’를 저술한 것으로 유명하다. 또 한국기독교 최초 청년회인 ‘엡윗청년회’ 창립인이었고, 정동교회 초대 청년회 회장을 역임했으며 한국 최초 유치원인 ‘정동몽양원’의 설립 발기인이기도 하다. 자세히 살펴보면, 그가 남긴 대부분의 업적 앞에 ‘처음’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님을 알 수 있다. 노병선 선생이 하는 일은 그만큼 남들보다 앞섰고, 따라서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깊고 넓었음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노병선 선생을 주목하게 만든 소위 ‘기독교신앙변증서’는 그의 선천적인 심성의 산물이다. 사물을 예의주시하는 진지한 자세가 그것. 노선생은 외국 선교사들이 자신의 돈과 시간을 들여 먼나라에 까지 와서 고생고생하며 교회당을 세우고 인쇄소를 만들고 전도하는 이유를 궁금해했다고 한다. 그러던 중 그는 이같은 궁금증을 푸는 가장 좋은 방법을 ‘기독교신앙을 아는 것’이라고 결론 내렸다.
노병선 선생은 “선교사들이 사랑과 봉사와 헌신을 하도록 만든 기독교신앙을 알게 되면 모든 의혹이 풀리고 참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설파했다고 한다. 추측하기로는, 노병선 선생은 선교사들과 함께 생활하며 성경을 배웠을 것으로 예상하고 있으며, 따라서 영어실력도 수준급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통역관으로 활동했다고 한다.
노병선 선생은 1871년 평북의 어느 농가에서 출생했다. 성장과정은 전혀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서울에 와서 선교사를 만나 배재학당에 다닌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회 졸업생의 영예를 안았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한다. 당시 함께 졸업한 인물들 중에는 이승만박사와 주시경 선생, 여운형 선생, 신흥우, 오긍선 등이 포함돼 있었다. 그가 독립운동과 애국계몽운동에 주력하게 만든 인맥이 여기서 이루어진 것은 아닌가 짐작된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