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이 하고 싶다”, “진실하다”, “정직하다”, “깨끗하다”, “포용적이다”, “거룩하다”, “이타적이다”, …… 성경은 우리에게 이런 삶을 추구하라고 가르친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교회에 대해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은 “거리를 두고 싶다”, “이중적이다”, “사기꾼 같다”, “배타적이다”, “부패했다” 그리고 “배타적이다”, “물질적이다”, “위선적이다”, “세속적이다“, ”이기적이다” 같은 반응이다.(지난 호 참조) 닮고 싶지 않은 정도를 넘어 가히 혐오하는 수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반응에 대해 “하나님의 평가가 중요하지 사람들의 평가는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거나, “믿음이 중요하지 행위가 중요하지 않다”는 이들도 있다. 필자는 그런 이들에게, “동굴에 들어가 혼자 살라”고 쏴붙여 주고 싶다. 성경은 하나님, 사람들과 정상적인 관계를 지키며 살아가라고 끊임없이 가르치고 있다.
그리스도인이 회복해야 할 기본기 ‘거룩한 신뢰(Ethos)’!
손흥민 선수의 아버지 얘기가 화제다. 선수 출신인 아버지는, 아들이 축구를 시작한 후 7년간은 기본기만 가르쳤다고 한다. 그 기본기가 오늘의 손흥민 선수를 있게 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기본기는 무엇일까? 예배 의식에 참석하는 것, 십일조 헌금하는 것, 전도하는 것, 술 담배 안 하는 것, 새벽기도회에 참석하는 것뿐일까? 만약 그렇게 가르쳐왔다면, 나아가 그것을 복 받는 조건으로 가르쳐왔다면 그런 목회자는 성찰해야 할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설득의 3요소로 에토스(Ethos), 로고스(Logos), 파토스(Pathos)를 들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것으로 신뢰성(Ethos)을 꼽았다. 사람들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의 말을 신뢰한다. 앞에서 예로 든 부정적 평가는 교회를, 그리스도인을 “믿을 수 없다”의 다른 표현이다. 우리의 기본기는 너무 허약하다. 거룩한 ‘신뢰(Ethos)’를 회복해야 한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위축된 교회가 여러 방법으로 ‘회복’을 시도하고 있다. 아직도 예배나 모임에 참여하지 않는 이들을 독려하고 비신자들에 대한 전도 활동을 시작하고 있다. 그렇지만 9%도 안 되는 신뢰도로 전도가 가능할까? ‘닮고 싶지 않은 사람’이 전해주는 전도지나 메시지에 관심을 가져줄까?
전도(傳道)는 삶의 가르침을 전하는 일이다. 좋은 약초도 자신이 써보고 효과가 있을 때 권한다. 자신이 그 가르침대로 살아보고 권해야 다른 사람이 그 삶을 보고 받아들인다. 교회는 그동안은 잘 편집된 전도지나 목사의 스피치 기술로 사람을 끌어모을 수 있었다. 그러나 이제 그런 것으로는 설득되지 않는다. 신자들은 성경을 읽지만, 비신자들은 신자들의 삶을 읽기 때문이다.
목사보다 드라마 작가를 더 추앙할지도…
요즘 <우리들의 블루스>와 <나의 해방일지>라는 드라마가 주목받고 있다. 앞의 드라마는 고등학생의 임신, 우울증, 다운 증후군의 이야기 등을, 뒤의 드라마는 애 딸린 홀아비의 연애와 호스트바 마담 출신인 주인공 이야기 등을 다루고 있다. 둘 다 우리 사회가 마주하고 있는 담론을 꺼내 해법을 모색한다. 앞으로 교회가 외면하는 동성애 문제 등도 등장할지 모른다.
설교(說敎)는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살아가면서 직면하는 문제들을 해결할 성경적 해법(道)을 제시하는 것이다. 설교자들이 지금처럼 현실적인 담론을 외면한 채, ‘복 팔기’나 성경본문 해설, 이스라엘 역사 해설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면 사람들은 목사보다 드라마 작가를 더 ‘추앙’하게 될지도 모른다. 이제 설교도 전도도 ‘삶이라는 기본’으로 회귀해야 한다. 그래서 거룩한 기본기를 발휘해야 한다!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가 머리에서 가슴까지라고 한다. 더 먼 거리는 가슴에서 손발까지! 생각이나 지식은 감동 과정을 거쳐야 행동(삶)으로 나타난다. 이 칼럼 이름이 ‘감사행전’이다. ‘감사를 삶(行)으로 전(傳)하자!’는 뜻이다. 앞으로 펼져질 ‘감사행전’ 이야기에 관심을 기대한다. <참고:유튜브 ‘감사행전TV’>