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의 임무에는 하나님의 세상구원을 선포하며 그의 주권아래 모든 사람들이 복종하는 순결한 마음을 회복시키는 것이 포함된다. 이 때문에 교인을 늘리는 성장전략은 전통적으로 필수요소가 됐고, 말씀대로 살아가려는 성실한 성도를 길러내는 양육은 최근 각광받는 프로그램으로 정착되고 있다. 양만 강조되던 목회현장이 질적인 변화의 필요성을 적극 수용하는 상황이다.
경기도 안산의 상록수명륜교회는 양과 질을 동시에 추구하며 성도 3명을 1,400명으로 성장시킨 모범사례를 보여준다. 그것도 8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다. 교회성장을 이룬 목회자들이 말하는 성장의 한계치를 두 번이나 훌쩍 넘어서 이제 초대형교회를 향해 전진하는 일만 남았다.
교회를 개척해서 현재의 상록수명륜교회를 일군 이상철목사는 “나 자신이 한 일이라고 한 번도 생각해본 일이 없다”면서 “오로지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었다면 있을 수 없는 기적의 사건”이라고 교회성장 과정을 설명했다. 이상철목사가 회고한 상록수명륜교회의 성장모토는 무엇일까. 겨우 40대 중반의 나이에 이토록 큰 은혜를 받아야 했던 그의 숨겨진 삶의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 잊지 않은 첫사랑의 기억
3명에서 1,400명으로 수직상승을 실제로 이끌어낸 이상철목사의 성장모토 이면에는 하나님의 사랑을 강렬하게 체험한 그의 어린시절이 있다. 12살이었던 어린 나이의 이상철은 기도하면서 성령의 강력한 체험을 통해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삶에 개입하시는 능력을 믿게 됐다. 우리들의 기억을 더듬어 보자. 어린 시절 이같은 체험을 못해본 사람이 과연 몇이나 될까. 하지만 장년 때까지 이를 기억하며 헌신의 삶을 사는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하다. 어린 이상철은 그의 신적체험을 소중히 간직하여 사회진출 분야가 많았지만 신학교를 선택했고 군 제대이후 형의 사업이 부도나면서 몇 년동안 생활고에 시달려 하마터면 중퇴위기에 몰렸지만 안전하게 복학했다. 순전히 어린시절 받은 하나님의 은혜결과였다.
이목사는, 하지만 교회개척을 앞두고 심각한 고민에 휩싸였다. 목회자로서 충분한가라는 자기질문에 용기를 가질 수 없었기 때문이다. 휘몰아치는 비를 맞으며 밤샘기도로 처절한 몸부림을 친 것도 수차례. 그는 결국 물놀이에서 아들을 잃을 뻔한 사건을 겪으며 두손들고 하나님 앞에 복종해야 만했다. 이상철목사는 복학직후인 신학교4학년 마침내 전도사 신분으로 안산지역 외진 곳에 지하25평(사택10평을 빼면 15평짜리)보증금 500만원에 월세50만원의 아주 작은 교회를 개척했던 것이다.
◆ 지하에서 독립건물로 이어진 축복
교회이름을 명륜교회로 지은 것은 이상철목사의 밤샘기도 결과였다. 하지만 하나님은 커다랗고 화려한 예배당을 주시기보다 지하25평, 그것도 주거용 10평을 제외하면 15평 남짓한 좁은 공간만을 하락하셨다. 두 가정 성도3명으로 시작한 교인은 입 소문을 통해 10명이 됐다. 문제는 첫 임대료 50만원을 어떻게 마련해야하는지 이목사는 답답했다. 그러나 그것까지 하나님은 해결하셨다. 성도 중 한 명이 낸 십일조 70만원. 예상하지 못했던 귀한 봉헌이었다. 천군만마를 얻은 듯 이목사는 용기를 얻었다고 한다.
최선을 다한 목회사역은 불과 2년만인 97년, 대지80평, 건평50평의 교회로 탈바꿈했다. 성장가도를 달리는 명륜교회의 건강한 목회스타일을 주목했던 인근교회 한 목회자가 “자신의 교회를 맡아서 운영해 달라”고 부탁했던 것. 그 교회는 무리한 건축으로 상당한 빚을 지고 있었다. “자신이 해결할 수 있는 문제로 생각했던 것 같다”고 이 목사는 회고했다. 이렇게 해서 그는 부도난 교회를 양도받아 건강한 교회로 탈바꿈시켰다.
목회핵심을 이룬 새벽기도와 금요기도는 이목사에게 있어서는 절대 포기할 수 없는 부분이다. “기도하기 싫으면 다른 교회를 찾으십시오.” 이목사는 설혹 불평하는 교인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99년에 예배당 증축, 2002년 11월에 지하1층 지상4층의 교회를 또 한 번 인수받았다. 역시 부도난 교회였다. “이상합니다. 저는 쓰러져 가는 교회를 받아서 다시 세우는 일을 하니 말입니다.” 3명으로 시작한 교회가 이런 과정을 거쳐 현재 1,400여 성도가 출석하는 교회로 바뀐 것이다.
◆ 부흥사로서의 사역과 비전
이상철목사에게는 두 가지 은사가 있다. ‘권면의 은사’와 ‘부흥사 은사’가 그것이다. 허스키 보이스인 이상철목사는 신학교 때 헤쳐나온 생활고 때문에 서민층이 대다수인 안산 상록수지역민과 활발한 교감을 갖는다. 그래서 그 어떤 시련을 당한 성도라고 하더라도 이상철목사에게만 오면 위로를 얻는다. 물론 고된 삶은 그대로다. 단지 어려움을 헤쳐 나가는 힘과 용기를 얻는다는 얘기다.
그는 과거부터 오산리 기도원에 자주 들른다. 은혜를 사모하기 때문이다. 하루는 약속된 강사가 사정으로 나오지 못하는 일이 벌어졌다. 기도원측은 자주 참석했던 이목사에게 양해를 얻어 일일강사를 부탁했는데, 참석자들의 호응은 예상 외로 컸다. 이상철목사는 이 때부터부흥사라는 아주 특별한 이름을 달게 됐다. 그는 신학교 강의와 빼곡한 부흥회 일정으로 바쁘지만 교회 중직자 훈련, 신앙훈련, 사회봉사 및 구제 등 지역사회 선교를 한 번도 소홀히 한 적이 없다.
국제기아대책기구가 추진하는 사역에 동참, 네팔의 보건대학 후원이사를 맡고 있다. 분기별로 교회예결산을 공고하며 투명한 재정확보에 노력하는 그는, 현재 28%인 선교비를 앞으로 50%로 확대하려는 방침이다. 병원과 학교사역에 큰 꿈을 갖고 있다. 그래서 이목사는 오늘도 1만평 대지 위에 지어진 1만 성도의 웅장한 초대형교회를 가슴에 간직하고 있다.
윤영호기자(yyho@ucn.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