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면 어떤 일들이 벌어질까? HSAN-4라는 유전병을 가진 환자들은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뼈가 부러져도 피부에 상처가 생겨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음식을 씹다가 혀가 물려 피가 나도 느끼지 못한다. 아픔은 산 자의 특권이다. 정상적 삶과 행복을 위해 아픔은 필수라는 말이다.
주로 메마른 사막에 사는 전갈은 구부러진 꼬리의 독침을 사용해 자신을 방어한다. 몸이 작은 생쥐들에게 전갈의 독침은 치명적이다. 그런데 전갈의 독침을 쏘이고도 아픔을 느끼지 않는 생쥐가 있다. 북미 서부에 사는 식충성 생쥐인 ‘그래스호퍼 쥐’는 전갈을 무서워하기는커녕 전갈을 잡아먹기까지 한다. 이 쥐는 전갈의 독을 억제할 수 있는 면역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도대체 아픔은 왜 존재할까? 가시에 찔렸을 때의 따가움, 불에 데었을 때의 쓰라림,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을 때의 마음의 아픔. 생명체들은 아픔과 통증을 통해 몸과 마음에 이상이 있음을 발견하고 치유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픔과 통증이 어찌 신체뿐이겠는가? 인간관계의 아픔을 통해 사회적 갈등을 진단하고 치유하는 길을 찾아내기도 한다. 문제는 아픔을 느끼지 못하거나 상처를 더 깊게 만드는 어리석음이다. 영적인 아픔도 마찬가지다. 한국 교회의 여러 가지 문제가 사회적 고통이 되는 것도 하나님이 한국 교회를 사랑해서 주시는 치유의 채찍일 것이다. 세계화의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면서 한•일간의 갈등이 동북아의 평화는 물론 건강한 지구촌을 병들게 하고 있다. 역사적 상처의 아픔을 느끼지 못하는 불감증 때문이다. 이런 때에 청계천 빈민의 성자(聖者) 노무라 모토유키(野村基之)가 2013년 10월 28일 서울시 명예시민증을 받은 사실은 한국 교회의 영적 아픔을 회복시키는 축복이며 역사적 고통의 망각 증을 앓고 있는 일본의 양심을 깨우는 약이 되기에 충분하다.
1974년 마흔세 살의 일본인 목사 노무라가 청계천 하류 개미마을(지금의 군자차량기지 부근)을 찾았을 때는 청계천을 따라 다닥다닥 붙은 움막집에 6만여 명이 모여 살던 빈민촌시절이었다. 한 집의 거적문을 들치고 들어가자 쪽방에 열댓 살 소녀가 누워 있었다. 옆구리와 무릎에 드러난 하얀 뼈에 파리 떼가 새카맣게 달라붙어 있었다. 노무라 목사가 소녀에게 인사를 건네자 소녀는 눈망울만 굴리며 쳐다볼 뿐이었다. 노무라는 “예수가 나를 쳐다보는 것 같았다.”고 했다. 소녀는 두 달 뒤 숨졌고 지금은 노무라의 사진 속에만 있다. 그가 1970년대 청계천의 밑바닥 삶을 담은 사진 500여장의 ‘노무라 리포트’라는 사진집을 지난주 한국사회에 내 놓았다. 그는 1984년까지 한국을 쉰 차례 넘게 드나들며 빈민들을 도왔다. 그는 “일제 침략이 없었다면 6•25도, 청계천 빈민도 없었을 것이다.”라고 믿고 고백한다.
노무라 목사는 도쿄 집을 팔아 청계천에 탁아소를 세우고, 남양만 간척지로 옮겨간 철거민들에게 뉴질랜드 종자 소 600마리를 사주기도 했다. 80년대까지 한국으로 부친 돈이 7500만 엔, 8억 원이 넘을 거라고 한다. 그는 야마나시현 산골에서 가정교회를 섬기며, 기증받은 헌옷을 입고 검소하게 살아가고 있다.
노무라 목사가 작년 2월 서울 일본대사관 앞 ‘평화의 소녀상’을 찾았다. 무릎을 꿇고 일본군위안부 동원을 사죄하면서 플루트를 꺼내 가곡 ‘봉선화’를 눈물로 연주했다. 그는 부르짖는다. “일본에 역사의식이 없다면 희망도 없다”고. 나도 묻고 싶다. 호텔 일식집에서 조찬기도회를 열고 있는 총재, 부총재, 대표회장, 공동회장, 그리고 총무 목사님들, 노무라 목사가 청계천에 있을 때 목사님들은 어디에 계셨는가요?
이 철 재 목사•기독교한국성서하나님의교회 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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