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일 베를린 선교회
베를린에서의 셋째 날. 독일 교회와의 만남이 계획된 날이기도 하다. 통일의 경험을 가진 독일 교회의 입장은 평화열차를 성사시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하다. 통일 과정에서 독일 교회가 보여준 평화에 대한 열정적인 태도와 헌신적인 기여는 여전히 분단의 현실을 극복하지 못하고 있는 한국 교회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첫 번째 거점지역이자 평화열차의 출발지인 베를린의 평화마당과 세미나도 통일 과정에서 진행된 독일 교회의 노력과 역할에 중점을 두게 될 것이다.
이른 아침 답사팀은 베를린 선교회(Berliner Missionswerk)로 이동했다. 독일 교회 에큐메니칼 지도자들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독일 교회는 답사팀을 반갑게 맞았다. 테이블 위에 독일 과자와 음료가 준비되어 있었다. 우리는 간단한 인사와 소개를 주고받고 ‘평화열차 프로젝트’에 대한 협의에 들어갔다.
평화열차 소위원회 위원장 나핵집 목사는 인사말을 통해 “평화열차 프로젝트는 통일을 경험한 독일 베를린에서 시작해 한국 부산에 이르는 평화를 만들어가는 과정”이라며 “독일 교회와 함께 남북 분단의 벽을 관통하는 꿈을 꾸고 있다. 양국 교회가 함께 상상력을 가지고 논의하자”고 말했다.
평화열차에 대한 프리젠테이션을 진행한 채혜원 교회협 화해통일국 국장은 “이 프로젝트에 대한 걱정과 우려가 있고, 여러 가지 어려움도 있다”면서도 “한반도 분단은 전 세계가 함께 풀어가야 할 문제다. 평화열차가 북한을 통과하는 것이 어려울수록 이 운동은 의미 있는 일이 될 것”이라며 중요성을 강조했다.
답사팀의 설명을 경청한 독일 교회는 다양한 질문을 쏟아냈고 활발한 토론을 펼쳤다. 양국 교회 관계자들은 여는 예배, 한반도 통일 세미나, 브란덴부르크 광장 촛불예배 등에 대해 논의했다.
독일 개신교협의회 아시아데스크 폴 오펜하임 국장은 “독일 교회는 한국의 분단에 대한 역사적인 상황을 잘 이해하고 있다”며 “분단을 극복하기 위해 평화를 주제로 한 한국 교회의 활동에 독일 교회도 동의한다”고 말했다. 폴 국장은 또 “평화열차 프로젝트에 많은 기대를 하고 있다. 우리에게 남은 문제는 모든 의심을 극복하는 것”이라며 “어떻게, 어떤 모습으로 실현시킬 것인지 함께 고민하자”고 답사팀을 격려했다.
이날 독일 교회는 베를린 선교회 아시아 담당 크리스토프 타일레만(Christof Theilemann) 목사를 평화마당 행사를 위한 독일협력 책임자로 선정했다. 또 독일에서 진행되는 평화마당 행사를 위해 베를린 선교회가 행정적인 협력을 맡기로 했다. 독일 교회의 환대 속에 협의를 마친 답사팀은 거점지역인 베를린 분단의 벽, 화해교회 등 독일 통일의 역사현장을 돌아보기 위해 걸음을 재촉했다.
베를린장벽
베를린은 분단과 통일의 경험을 그대로 간직한 도시다. 도심 곳곳에 분단 당시의 상징물이 남아 있다. 여기저기에 세워진 박물관과 기념관이 분단 당시 고통스러웠던 상황을 가감 없이 보여주고 있었다. 분단의 기억, 통일 과정, 이후의 사회통합에 대한 경험과 역사를 기록하고 보존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독일은 분단과 갈등으로 점철됐던 분열의 역사를 그대로 재현함으로써 사회통합의 동기를 부여하고 있는 듯 보였다. 베를린 시민들은 통일의 경험을 자랑스러워했다.
하지만 독일은 통일 이후 사회통합 과정에서 진통을 겪었다. 경제력이 강했던 서독 위주의 흡수통일이었던 탓에 경제적 격차와 생활수준 차이로 인한 동독 주민들의 상대적 박탈감이 컸던 것이다. 서독 주민들 역시 과도한 사회통합 세금 등에 대한 불만이 존재했다. 지금도 구동독을 오시(Ossi, 게으르고 불평 많은 동독놈), 구서독을 베시(Wessi, 거만하고 잘난 척하는 서독놈) 등으로 부르며 서로를 조롱한다. 독일의 사회통합에 대해 연구한 김해순 독일 프랑크푸르트 괴테대학 교수는 “정치경제적인 체제통합은 긍정적인 효과를 거두었고, 물질적 부분은 동서가 어느 정도 비슷해졌다”면서 “그러나 문화적 정신적인 통합은 아직도 요원한 거리에 있는 것 같다”고 평가했다.
독일은 분명 과도한 통일비용을 지출했다. 하지만 그 대가로 평화를 얻었다. 설령 그것이 갑작스런, 농익지 않은 통일이었다고 할지라도 말이다. 한 도시를 가르던 선은 사라졌다. 서로를 향해 총구를 겨누면서 선을 넘어온 사람을 무자비하게 죽이던 시대는 지나갔다. 이를 발판으로 독일 국민들은 진정한 자유를 누리고 있다. 통일 이후의 갈등이 아무리 크다고 하더라도 이들이 얻은 평화와 자유에 비교할 수 없는 이유다.
독일 통일에 대한 객관적이고 면밀한 검토는 한반도 통일 논의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자료다. 독일 교회는 분단과 통일의 경험, 그 과정에서 진행된 교회의 역할을 잘 기록하고 보존하고 있다. 여기에는 독일 화해교회 만프레드 피셔 목사의 노력이 있었다. 베르나우어 슈트라세(Bernauer Strasse)에 위치한 화해교회는 베를린장벽의 경계선 위에 세워져 있었다. 구동독 정부는 관측소를 가린다는 이유로 교회를 폭파했고, 통일 이후 재건된 것으로 유명하다.
피셔 목사는 통일 후 점차 사라져가는 분단의 흔적들을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각별한 노력에 베를린 시는 화해교회 옆 장벽 일부를 영구 보존하기로 했다. 또 교회 옆에 베를린장벽기념관을 건립했고, 기념 공원도 조성했다. 이 공원에는 베를린장벽을 넘다가 희생당한 ‘장벽희생자’들을 추모하는 조형물도 설치되어 있다.
답사팀에게 독일 분단의 현장을 소개한 피셔 목사는 “우리는 베를린장벽을 보면서, 자유는 오랫동안 갇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며 “베를린장벽은 결국 자유를 향한 열망 때문에 무너진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한국도 희망을 품으면 우리의 예상보다 빨리 분단의 벽이 허물어질 것”이라며 평화열차 프로젝트 성공에 대한 희망을 놓지 말라고 격려했다.
베를린기독교한인교회
독일은 여러 가지 면에서 한국과 닮았다. 독일은 2차 대전 패전 후 분단을 경험했고 ‘라인강의 기적’을 이뤘다. 한국은 분단과 6.25 전쟁을 경험한 후 ‘한강의 기적’을 이뤘다. 차이가 있다면 독일은 1990년 통일을 성취했고, 우리는 여전히 정전협정 상태라는 것이다.
답사팀은 조성호 목사가 시무하는 베를린기독교한인교회에 방문했다. 교인들은 정성껏 준비한 한식을 차려놓고 답사팀을 반겼다. 오랜만에 맛보는 집밥에 우리는 정신없이 허기를 채웠다.
여기에서 나는 1960년대 파독 간호사 출신 강경선 장로를 만났다. 40여 년 전 꽃다운 나이에 고향을 떠나 국가를 위해 헌신했던 이들은 되돌아가지 않고 남았다. 강 장로는 “이주노동 비자로 체류했던 우리는 이 교회를 중심으로 독일 정부를 상대로 캠페인을 벌였다”며 “독일은 우리의 주장을 받아들여 장기체류가 가능하도록 법을 개정했다”고 말했다. 그들은 세월을 비켜가지 못했고, 지나간 과거를 반추하며 아쉬워했다. 하지만 40여 년 동안 변하지 않은 한반도의 분단 현실을 놓고 여전히 기도하고 있었다.
독일 교민들은 평화열차 프로젝트에 깊은 관심을 나타냈다. 또 독일에서 진행되는 평화마당에 대한 다양한 의견을 제시했다. 평화열차에 대한 소개와 간담회가 끝나고, 독일 교회 성도들은 누군가 시작한 ‘우리의 소원’을 구성지게 합창했다. 통독 과정을 지켜본 이들은 먼발치에서도 통일 한국을 그리고 있었다. 분단의 벽을 넘는 평화열차가 성사되어야 한다는 것이 더욱 명확해졌다. 그리고 말로 설명할 수 없는 민족주의적인 감수성이 밀려왔다.
31일 빌헬름교회
독일의 역사의식은 카이저 빌헬름 기념교회(Kaiser Wilhelm Memorial Church)에서도 엿볼 수 있었다. 네오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이 교회는 2차 세계대전 당시 폭격을 당해 종탑과 건물이 파괴되었다. 베를린시는 도심 한복판에 폭격 맞은 교회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그 옆에 새로운 교회를 세워 전쟁의 아픔을 기억하고 있었다. 안타깝게도 답사팀이 방문했을 때 교회는 외관을 가린 채 보수작업을 하고 있었다. 파괴된 건물을 보존하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웅변하는 듯 했다.
우리는 국회의사당, 브란덴부르크광장, 유대인박물관을 둘러보고 모스크바로 향하는 열차 길에 올랐다. 본격적인 평화열차 순례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평화열차는 우리가 극복해야할 분단 현실에 도전하는 평화운동의 일환이다. 통일은 모두가 함께 만들어 가는 여정이며, 통일은 생각보다 가까울 수 있다. 교회는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면서 사람들을 깨우고 세워나가야 한다. 독일 교회와 독일의 한인 교회가 그것을 말해주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