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세는 어떤 경로를 통해서든지 자기의 뿌리를 알고 고난의 길을 택한다. 아니 자신의 출신을 안 모세는 더 이상 적국의 왕궁에서 편하게 지낼 수는 없었다. 오늘날에도 외국의 눈치만 보는 철새 정치인들이 많음을 볼 때 모세는 우리에게 새로운 모습으로 다가온다.
달리 생각하면 모세는 모르는 척 하고 있다가 자기가 왕이 되어 히브리인을 구원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모세는 동족의 아픔을 보고 의기를 억누르지 못한다. 동족이 이집트인에 의해 구타당하는 것을 보고 그 이집트인을 살해하게 된다. 나중에 같은 히브리 사람들끼리 싸우는 것을 보고 “너희들은 동족끼리 싸우느냐”고 호통을 치자 그를 두려워한 히브리인들이 모세의 살인 사건을 폭로하게 된다. 모세는 결국 동족에게 당하는 꼴이 된다. 모세는 할 수 없이 광야로 도망가게 되고 여기서 그의 삶은 다시 시작된다(출 2:11~15). 그 새로운 인생은 하나님을 만남으로 가능해진다.
모세는 미디안의 제사장 가문에서 결혼하여 양치는 일을 하다가 호렙산에서 하나님을 만나게 된다. 타지 않는 불꽃을 통해 계시하는 하나님과 모세의 만남은 이스라엘의 장래를 결정한다. 모세는 하나님의 이름을 묻는다. 자기 백성에게 하나님이 누구인지를 알려줘야 하기 때문이다. ‘나는 스스로 있는 자’라는 뜻을 지닌 여호와께서 처음으로 모세에게 알려지는 순간이다(출 3:14). 아브라함을 바벨론에서 인도해 낸 그 전능의 하나님(엘샤다이)이 바로 여호와라고 소개된다.
여호와는 모세에게 이집트의 파라오에게 가서 이스라엘의 해방을 선포하라고 명하신다. 그러나 이미 80세가 된 노인 모세는 이 엄청난 임무를 감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지팡이에 나타난 하나님의 능력을 보면서도 모세는 주저한다. “나는 본래 말에 능치 못한 자라 주께서 주의 종에게 명하신 후에도 그러하니 나는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니이다”(출 4:10). 자기 민족을 구원하는데 말을 못한다. 이것은 결국 파라오와의 싸움이 물리력을 바탕으로 하는 전쟁이 아니라 말로 싸우는 것임을 의미한다.
말 속에는 진실이 담겨 있다.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할 사람은 말을 잘 해야 한다. 이 말은 미사여구를 써서 남을 현혹시키는 말이 아니라 있는 그대로를 과감히 선포하는 용기 있는 말이어야 한다. 바른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소유한 예언자들만의 몫이다. 그러나 모세는 말을 못한다. 아니, 말을 못하기보다는 파라오와의 입싸움에 자신이 없는 것이다. 언제 죽을 지도 모르는 그 싸움에 끼어들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하나님은 결국 아론을 세워 모세의 입을 대신하게 한다(출 4:14~17).
/교수·강남대 구약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