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사 속 인물 : 정용현목사 1903-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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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사 속 인물 : 정용현목사 1903-1950
  • 윤영호
  • 승인 2005.01.19 1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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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폭압과 공산당의 잔학상 속에서 순교



교육자로 부름받은 정용현목사는 애초 성결교 소속의 사역자였으나 후에 장로교로 옮겨 목회하다가 한국전쟁 발발과 함께 평양의 공산당 교도소에서 옥사한 순교자이다. 일제시대의 잔혹성을 거친 이후 곧바로 닥친 공산당의 폭압성을 견디다 결국 순교의 길을 피하지 못한 채 옥사하고 말았다.


정용현목사는 평북 선천 출생으로 신성중학교 출신이다. 신성중학교는 철저한 기독교신앙으로 다져진 교육기관으로, 종전의 봉건적 사고방식 철폐를 구호삼아 신문명을 받아들이는 목적으로 개화교육을 시킨 곳이다. 따라서 정목사는 이 곳 학교를 통해 기독교신앙을 접하고 자연스럽게 사역의 길로 들어서게 된 것이다.


 

정목사는 하지만 황해도의 연송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기독청년의 이상을 실현할 유일의 길로 교사직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는 30세의 나이에 이르자 목회자로서의 사명을 느끼고 경성신학원(현재 서울신학대학교 전신)에 들어갔으며 1936년 이 학교를 졸업하고 성결교단의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첫 부임지는 사리원교회. 하지만 불과 2년 만에 일제시대의 그 유명한 신사참배 사건이 터져 교회폐쇄라는 오명의 역사를 겪는다. 성결교의 대표인물인 김응조목사를 비롯 김유순, 유형기 등 여러 교파의 지도자들이 대거 검거되는 폭압이 현실로 나타난 시기였다.


해방 이후 정목사는 선천에 머물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당시 장로교였던 동산교회를 시무하면서 장로교목사가 된 그는 공산당의 의도적인 종교행사 방해와 신학교 폐교 그리고 기독교도연맹에 의한 강제 편입 등을 겪으며 결국 감옥에 갇히게 됐다. 박봉진목사, 정태희장로, 김지봉집사 등이 고문으로 순교하는 일이 바로 이 때 발생했다. 1947년 체포된 그는 1950년 전쟁이 일어난 직후 패주하는 공산당의 방화로 옥에서 그만 순교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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