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의 차이에서 발생한 동·서교회 신학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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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의 차이에서 발생한 동·서교회 신학 차이
  • 박찬호 교수(백석대 조직신학)
  • 승인 2024.08.14 0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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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찬호 교수의 목회현장에 꼭 필요한 조직신학_ 68) 동·서방 교회의 삼위일체론

1517년의 종교개혁을 통한 서방 기독교의 분열 이전에 1054년에 보다 큰 분열이 교회 안에 있었다. 그것은 동·서방 교회의 분열이었는데 분열의 이유는 1453년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로마 주교인 교황의 수위권을 동방교회는 받아들이기를 거부하였고 이 문제는 지금도 여러 교회연합을 위한 움직임에 가장 큰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

동방교회와 서방교회의 분열은 395년 동·서로마 제국의 분열에 이은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동·서 로마제국의 분열은 데오드시우스 황제가 두 아들에게 각각 동로마와 서로마제국을 물려주며 이루어진 일이었는데 이후 서로마제국은 얼마 지나지 않아 476년 멸망하고 만다. 이에 비하여 동로마제국은 동방에서 일어난 이슬람 세력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하며 버텨주다가 1453년 콘스탄티노플이 함락되며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기본적으로 동방교회는 신약성경이 기록된 헬라어를 사용하는 교회였다. 하지만 로마를 중심으로 한 서방교회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교회였다. 서방교회를 대표하는 신학자는 어거스틴(354~430)이다. 논란의 여지가 있기는 하지만 어거스틴은 헬라어를 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만큼 언어의 장벽이라고 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쉽게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번역만으로 해소될 수 없는 난점이 존재한다. 예컨대 어떤 단어가 지니는 미묘한 뉘앙스 등은 그 언어를 모국어로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는 미루어 짐작할 수 없는 것이다.

동·서방의 삼위일체론과 관련하여 “하나의 실체 세 위격”이라는 도식에서 문제가 되었던 것은 ‘위격’에 해당하는 헬라어 ‘휘포스타시스’와 라틴어 ‘페르조나’가 매우 다른 어감을 가졌다는 점이다. 동일하게 세 위격에 해당하는 표현인데 ‘휘포스타시스’는 히브리서 11장 1절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의 ‘실상’에 해당하는 단어라고 한다면 ‘페르조나’는 잘 알려진 것처럼 연극의 가면을 뜻한다. 이런 언어의 뉘앙스 차이 때문에 동방신학에서는 서방신학에서보다 삼위가 좀더 부각되었을 것이 분명하다. 같은 삼위일체를 다루면서도 심상 자체에 많은 차이가 있었으리라는 점을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서방 교회는 삼위보다는 일체에 주된 강조점이 있는 삼위일체론을 주장하였고 동방 교회는 일체보다는 삼위에 우선하는 삼위일체론을 전개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체를 강조하면 삼위가 약화되고 삼위를 강조하면 일체가 약화되는 것은 명약관화한 일일 것이다. 그런 면에서 그 성향에 있어 동방신학은 삼신론적인 성향을, 서방신학은 양태론적인 성향을 보일 수밖에 없었다. 물론 동방신학에서는 자체 안에 잠재된 삼신론적인 성향을 극복하기 위해 ‘성부의 우위성’ 또는 성부의 ‘단일통치’ 또는 ‘단원’(monarchy)을 인정하게 되었고 이는 서방신학의 양태론적인 성향과는 다른 형태의 단일신론을 배태하게 되었다. 즉 성자의 성부와의 동일본질을 부정하는 아리우스주의가 등장하게 된다. 지금의 여호와의 증인은 이 아리우스 이단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떤 의미에서 삼위보다 일체를 우선으로 하는 서방신학의 틀 안에서는 삼위일체론은 하나님의 본성론에 비하여 부차적인 중요성 밖에 지니지 않게 되며 삼위일체론은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이나 교회적인 실천과는 무관한 하나님에 관한 철학적 추상이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가 되고 만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God for Us)이라는 책에서 케서린 라쿠나는 16세기 초에 있었던 반삼위일체론 운동을 서구 역사 속에 있었던 대표적으로 삼위일체론을 무시한 실례로 소개한다.

이 운동은 “삼위일체론의 성경적인 기초의 결여, 이성과 배치됨, 그리고 신앙의 실천과 관계 없음 때문에” (『우리를 위한 하나님』, 144) 삼위일체론을 거부하였다. 라쿠나에 따르면 아퀴나스의 『신학 대전』의 훨씬 더 중요한 구조적인 특징은 하나님의 본질을 그 출발점으로 하고 있으며, 하나님의 본질은 삼위가 각각의 위격으로 존재하는 것과는 분리되어 탐구되었다. “이러한 방식의 탐구는 어거스틴에 의해 준비되었으며, 토마스의 혁신은 자신의 신학을 위한 기초로 아리스토텔레스의 형이상학을 사용한 것이었다” (『우리를 위한 하나님』, 147).

동·서방의 신학은 서로 단절된 관계가 아니라 이런 저런 모양으로 영향을 주고 받았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작품에서 충격적인 사실은 그들이 서로 너무나 달랐다는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 강요』를 쓸 때 이 사실을 인식하고 있었다. 동방신학을 대표하는 갑바도기아 교부들과 서방신학을 대표하는 어거스틴은 다른 기반 위에서 작업을 했으며 다른 원리를 사용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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