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기 70년의 예루살렘 공방전 결과 유대인들의 역사는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정치적 측면>
로마인들은 줄리어스 시저 때부터 유대인들에 대해서는 관용적인 정책을 펼쳐 왔습니다. 그 배후에는 팔레스타인이 갖는 지정학적 중요성이 있었다는 것은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습니다. 그런데 이번 전쟁의 결과 그런 관용정책은 완전히 사라지게 됩니다.
<종교적 측면>
예루살렘의 대제사장 제도가 폐지되고, 산헤드린도 없어집니다. 성전이 파괴되었기 때문에 사두개파가 없어지고, 전쟁의 주도세력이었던 열심당도 사라집니다. 그리고 은둔생활을 하던 엣센파도 주후 68년에 로마군에 의해 초토화 된 후에 명맥이 끊어집니다. 결국 전쟁 이후에는 유대교의 4대 분파들 중 오직 바리새파만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그들은 율법 중심의 분파로서 성전이 없이도 존속이 가능했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와의 관계>
주후 2세기에 리용(Lyons)의 주교였던 이레네우스(Iranaeus, A.D. 125~202)에 따르자면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이 누가복음 21:20~24에서 하신 명령에 따라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안전한 곳에 피신하여 있었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21절에서 “그때에 유대에 있는 자들은 산으로 도망갈 것이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기독교인들은 이 말씀에 따라 요단강 동쪽에 있던 펠라(Pella)라는 산 위의 도시로 피신하여 전쟁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머물렀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이 전쟁에 참여하지 않은 이유는 간단합니다. 이 전쟁의 주동자들은 열심당원들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자신들이 싸움을 하여 피를 흘리면 하나님께서 메시아를 더 빨리 이 땅에 보내주실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자들이었습니다. 전쟁을 시작하게 된 이유도 거기에 있었습니다. 하지만 기독교인의 입장에서는 메시아는 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은 이미 이 세상에 오셨다가 승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메시아를 오시게 하려는 싸움에는 참여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백석대·신약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