티크바(소망)
여호수아 2:18~21
찬송: 95장
이스라엘의 국가 제목이 하(그) 티크바(소망)입니다. 이스라엘 역사가 너무나 고통 가운데 소망이 보이지 않을 때 소망이라는 국가를 만들어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이스라엘의 회복을 꿈꾸기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자기가 사는 여리고 성읍의 멸망이 가까워지자 하나님을 두려워했던 기생 라합이 이스라엘의 정탐꾼을 숨겨주며 자기들의 가족과 친척은 살려달라 합니다.
이에 본문 18절에 정탐꾼들은 자기들이 공격할 때 창문에 붉은 줄(후트:실, 끈)을 매고 집에 모두 들어가 있으라 합니다. 라합은 “너희 말대로 하겠다”하며 21절에 붉은 줄(티크바:끈,소망)을 창문에 맵니다. 정탐꾼들의 이야기를 듣고 라합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그냥 줄이 아닌 소망의 줄을 매달았습니다.
하나님을 바라고 믿으면 소망이 생깁니다. 우리는 어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절망하지 말고 소망을 잃지 말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생각은 재앙이 아니라 미래와 희망을(티크바:끈, 소망) 주는 것이라 했습니다(렘 29:11) 다윗도 대적들에게 공격을 당해 힘들 때 고백하기를 “나의 영혼아 잠잠히 하나님만 바라라 무릇 나의 소망이(티크바) 그로부터 나오는도다”(시 62:5)라고 했습니다. 오늘 이 하루도 소망으로 일어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오늘도 저희들에게 소망을 더하여 주사 믿음으로 일어서게 하소서!
어떻게 여호와를 기쁘게 해 드릴까?
말라기 2:17
찬송: 336장
사람이 감히 하나님을 괴롭힐 수 있을까요? 말라기 선지자는 사람이 하나님을 괴롭힐 수 있다고 말합니다. “너희가 말로 여호와를 괴롭게 하고도” 사람이 하나님을 괴롭히는 도구는 ‘말’입니다. “귀를 지으신 이가 듣지 아니하시랴”(시 94:9) 하나님은 늘 우리의 소리에 귀 기울이고 계십니다.
사람의 어떤 말이 하나님을 괴롭게 할까요? 오늘 본문은 2가지를 알려 줍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오해하거나 모함하는 말입니다. “모든 악을 행하는 자는 여호와의 눈에 좋게 보이며 그에게 기쁨이 된다” 오해는 의도성이 없는 왜곡입니다. 모함은 의도성이 있는 왜곡입니다. 의도성이 있든 없든 하나님에 대한 왜곡된 사실이 사람의 입에서 입으로 전파되는 것은 하나님을 괴롭히는 행위입니다.
둘째는 하나님을 조롱하는 말입니다. “정의의 하나님이 어디 계시냐” 비아냥입니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을 괴롭혀 드린다면 반대로 사람의 말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린다는 말도 됩니다. 성경에 나오는 많은 믿음의 선진들은 말로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렸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시 18:1),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단 3:18) 우리의 입술이 하나님을 기쁘게 해 드리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말이 하나님을 괴롭혀 드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 기쁨이 되게 하옵소서.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
사무엘상 16:1~13
찬송: 192장
사울은 아말렉을 진멸하라는 하나님 명령 앞에 순종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은 그런 사울을 대신할 새로운 왕을 준비하십니다. 사무엘은 하나님 명령을 받들어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 그에게 기름을 붓습니다(13). 그러나 사무엘이 처음부터 다윗을 기름 부을 자로 생각한 것은 아닙니다.
사무엘은 맏아들 엘리압의 빼어난 용모와 키 때문에 그가 하나님께서 택하신 자일 것이라 생각했습니다(6). 그러나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보는 것은 사람과 같지 아니하니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7)
맏아들 엘리압 뿐 아닙니다. 거기 있던 이새의 일곱 아들 모두 기름부음 받을 자가 아니었습니다. 남은 것은 막내 다윗뿐입니다. 그 시각 다윗은 들판에서 양을 돌보고 있었습니다. 사무엘은 다윗도 오게 했습니다. 막 양 틈에서 돌아온 다윗의 모습은 얼마나 지저분하고 초라했을까요? 그러나 하나님께서 사무엘에게 급히 말씀하십니다. “이가 그니 일어나 기름을 부으라”(12)
하나님은 사람의 겉모습이 아니라 중심을 보십니다. 우리 모습이 사람들 보기에 조금 초라할지라도 하나님은 주님의 일을 감당하고도 남을 믿음의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우리 각자가 그런 사람이 되길 원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의 겉모습이 아닌 중심을 살피시는 주여, 오늘 하루도 우리 속마음이 주님 보시기에 기뻐하실 복되고 거룩한 생각들로 가득하게 하소서.
예수 믿는 도
사도행전 24:24~27
찬송: 312장
유대 지역을 총괄하는 총독인 벨릭스는 복음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복음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벨릭스 총독은 그 아내와 함께 사도에게서 복음을 들었을 때 두려워하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두려움은 긍정적 반응으로 이어지지 못하였고, 그는 “틈이 있으면 너를 부르리라”고 교만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는 돈을 받고 석방해 줄 수도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탐욕의 포로로 영생 얻을 마음으로는 준비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결국 차기 총독이 부임해올 때까지 2년간 사도를 억류시켜 두었는데 이는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함이었습니다. 인권과 정의보다는 유대인들의 반감이라는 여론에만 편승했던 세속 정치인의 일면입니다.
복음의 결실을 위해서는 복음의 씨를 받는 땅이 중요합니다. 차이는 오로지 밭에 있습니다. 벨릭스는 말씀을 들었지만 탐욕에 얽매여 믿음과 화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는 벨릭스에게 그리스도 예수를 믿는 도로서 의와 절제와 장차 오는 심판을 강론했습니다. 우리 믿음에는 반드시 의가 있어야 합니다. 이 의(義)란 인간적 의가 아닌 하나님의 의와 그리스도 예수의 의로서 그것을 믿고 따라가는 의의 증거도 나타날 필요가 있습니다. 절제란 성화를 가리키는 대표적 의미로 주어졌는데 벨릭스는 자기 안의 재물욕을 절제하지 못했습니다. 믿는 사람은 진리로써 자기를 다스릴 줄 알아야 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복음의 도를 잘 파악하여야 인격과 삶이 성결에 이르게 하옵소서.
은혜를 기억하면
마태복음 20:1~16
찬송: 310장
포도원의 비유를 보면 주인의 뜻이 우리의 뜻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포도원에는 주인의 부름이 있어야 들어갈 수 있고, 시간과 품삯도 주인이 정하게 됩니다. 시간과 상관없이 주인은 한 데나리온을 주기로 했습니다. 그런데 일찍 들어온 사람이 주인을 원망합니다. 왜냐하면 늦게 들어온 사람이 한 데나리온을 받는 것을 보고 자신은 일찍 들어왔으니 더 받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일찍 들어온 일꾼도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받게 되자 주인을 원망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일찍 들어온 사람이 손해를 본 것인가요? 주인과의 약속을 생각하면 전혀 손해를 본 것은 없습니다. 그저 다른 사람과 비교했을 때 자신이 기대한 것을 얻지 못한 것에 대해 마음에 원망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일하고 싶어도 불러주는 사람이 없어 놀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일할 수 있는 일자리를 얻게 되었다고 기뻐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과 비교하면서 기쁨도 감사도 잃어버리고, 다른 사람보다 더 큰 보상을 바라는, 그저 이익에 밝은 모습이었습니다.
천국에 가기를 소망하는 것은 이 땅 모든 사람들의 소망입니다. 우리를 천국 백성으로 먼저 불러주시고 구원을 주심에 대해 기쁨과 감사로 살아야 합니다. 값없이 우리를 구원하신 은혜를 귀히 여기며 사는 성도가 될 수 있길 소망합니다.
•오늘의 기도
받은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며 기뻐하며 살게 하소서.
선교입니다
마태복음 28:19
찬송: 505장
나의 나 된 것은 참으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또한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서 우리의 삶의 판도가 바뀌기도 합니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와의 만남으로 우리의 삶의 목적은 완전히 바뀌어 버렸습니다. 오늘 본문에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하시겠다고 말씀하십니다.
이 말씀은 우리에게 주신 약속인데 이 약속을 받아 누리기 위해서는 몇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들 중에 군대 갔다 오신 분들이 계실 것입니다. 군대는 어떤 곳입니까? 명령에 절대 복종하는 곳입니다. 주님의 명령도 마찬가지입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그런 것이 아니라 반드시 해야 하는 것입니다.
주님은 오늘 제자들에게 그리고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명령하고 계시는데 그 명령은 무엇입니까? 바로 ‘선교’입니다. 오래전 바울의 선교지들을 방문한 적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자신의 전 생애를 주님의 명령을 따라 살다간 바울 사도의 흔적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이후 저는, 바울의 열정을 따라 선교할 것을 다짐했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믿음으로 사는 것이라” 바울의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삶으로 나아갈 때 주님은 세상 끝날까지 함께 해 주실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신 이 선교의 사명 감당함으로 주님의 함께 하시는 은혜가 항상 있기를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주님, 제가 이 땅의 사는 목적과 이유가 선교입니다. 목적에서 빗나가지 않게 살도록 도와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