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석의 설립자 장종현 총장은 <신학은 학문이 아닙니다>는 책을 통해 신학자들이 노는 놀이터에 폭탄을 던졌다. 칼 바르트가 1919년 <로마서 주석>을 통해서 자유주의 신학자들의 놀이터에 폭탄을 투하한 것처럼. 바르트는 신정통주의자로 자유주의를 혹독하게 비판했는데, 장종현 설립자 총장은 개혁주의자로 사변신학자들을 신랄하게 비판했다.
장종현 총장은 신학의 학문성 자체를 부인하지 않는다. 신학이 성경 위에 걸터앉아 성경을 좌지우지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학은 어디까지나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밝히 드러내는 수단이다. 신학은 성경대로 예수 생명의 복음을 체험하고 전달하도록 돕는 수단일 뿐이다. 신학은 결코 구원을 줄 수 없다. 성경만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가 있게” 하는 생명의 말씀이다 (딤후 3:16).
장종현 설립자 총장이 비판한 신학은 머리로만 하는 사변신학(思辨神學)이다. 신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지성과 감성과 의지의 전인(全人)으로 해야 한다. 다른 학문은 지성만으로 할 수 있지만 신학은 지성만으로 할 수 없고 해서도 안 된다. 신학은 절대규범인 하나님의 말씀을 삶의 실존과 상황에 적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100% 하나님 말씀이고, 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뒷받침하는 수단이다. 하나님께서 성경을 통해 머리에만 말씀하시면서 ‘너희 머리로만 알아라’고 하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는 ‘머리로 알고 가슴으로 느끼고 의지로 행동하라’고 하시는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knowledge about God)이 아니라 하나님을 머리로 깨닫고 마음으로 수용하고 생활로 체험하게 하는 진리(truth of God)다.
나는 신학생 시절 때부터 ‘신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을 꾸준히 해 왔다. 신학교에 들어갈 때 하나님을 더 체험적으로 알고 더 뜨겁게 사랑하고 섬기게 될 것으로 기대했다. 신학교에 들어가서는 공부하는 것이 너무 바빠서 성경을 읽고 기도하고 성경대로 실천하는 것이 등한시되는 것을 느꼈다. 신학은 신앙의 불을 끄는 소방차라는 말도 많이 들었다. 미국 유학생 시절에는 신학적인 부담이 너무 커서 ‘신학이 이래서는 안 된다’는 갈등이 더 커졌다. 유학을 하면서 ‘학문적으로 거듭났다’는 뿌듯함이 있었지만, 동시에 ‘이렇게 좋은 신학으로 왜 예수 생명을 체험하고 교회를 살리고 세상을 변화시키지 못할까?’ 하는 질문이 생겼다.
정통신학을 배우면서도 예수생명이 약화되는 현실을 놓고 나름대로 해결하려고 애를 썼다. 새벽에도 집에서 기도하고 점심 먹고도 학교에서 기도하고 학교에서 집에 돌아와 지하실에서 기도했다. ‘신학은 반드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하고 교회를 살려야 한다’는 신념을 가지고, 박사 논문을 쓰던 중에도 교회 청년부를 섬기면서 교회를 위한 활동을 그치지 않았다. 학교 서점에서도 학문적인 책만이 아니라 경건 서적도 사서 읽었다. 교수 시절에도 휴식 시간에 기도실과 점심 식사 후 산속에서 기도하고, 여러 교회에서 설교와 강의도 했다.
신학과 학문의 관계는 어제오늘의 문제가 아니라 교회 역사상 상존했던 문제다. 이것은 신학과 신앙의 관계와도 연결되어 있다. 이것은 또한 신학의 본질 문제이다. 나는 신학이 예수 생명을 체험하고 전달하는 수단이라는 확신이 있다. 신학은 반드시 교회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는 확신도 있다. 나는 신학교에서도 ‘성경은 생명/생활의 책’이라고 강조했고, 22년간 대구동신교회에서 개혁주의 생명사역을 했고 질적 양적으로 놀라운 변화를 체험했다.
나는 이런 확신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것을 신학계에 발표하지 못했다. 사변신학자들의 운동장에 폭탄을 던지는 것은 상상하지도 못했다. 백석대 설립자 장종현 총장이 바로 이 일을 해냈다. 신학은 사변적 학문이 아니라 예수생명의 복음이라는 성경적인 확신. 공개적으로 밝히는 용기. 신학계와 교계에 꾸준히 영향의 폭을 넓혀 가도록 일하시는 하나님의 은혜. 이것이 놀랍다. 개혁주의생명신학은 한국만이 아니라 세계 신학계와 교계의 살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