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일]
비판하거나 정죄하지 말라 / 누가복음 6:37 / 찬송: 133장
김창기 목사 (해뜨는교회)
건강한 공동체 회복을 위해 하지 말아야 될 것과 해야 될 것이 있다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첫째, 비판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서 비판이라고 하는 크리노는 단어의 뜻을 찾아보면 송사하다, 분리하다, 판단하다, 심사하다는 뜻이 있습니다. 누군가를 조사하고 판단하기 시작하면 그 가정과 공동체는 분리되기 시작합니다. 인류가 선악과를 먹은 이후로 각자가 자기 중심적인 선악과의 기준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사람을 판단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아무나 판단하지 않았습니다 “너희는 육체를 따라 판단하나 나는 아무도 판단하지 아니하노라(요 8:15)”
둘째, 정죄하지 말아야 되겠습니다. 여기서 정죄라고 하는 카타디카조는 ‘(형을)선고하다’, ‘유죄 판결을 내리다’라는 뜻이 있습니다. 비판하는 수준에서 한걸음 더 나아가 자기가 재판관이 되어 형을 선고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예수님은 간음하다가 현장에 잡혀 온 여인에게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용서 때문에 존재하게 된 백성들입니다. 베드로는 일곱 번까지 용서하면 많이 용서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베드로에게 예수님은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 용서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만약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할 때 하나님으로부터 또 다른 용서의 경험을 받게 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나를 용서하신 주님! 나도 용서의 삶을 살게 하소서 / 여호수아 1:9 / 찬송: 403장
[화요일]
두려워하는 여호수아에게 / 여호수아 1:9 / 찬송: 403장
박현욱 목사 (창대교회)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이 말씀에 따르면 여호수아 장군의 현재 상태는 강하지 않습니다. 담대하지 않습니다. 두려워하고 놀라고 있습니다. 왜 여호수아 장군은 두려워합니까?
이스라엘 민족의 탁월한 지도자 모세가 120살에 세상을 떠납니다. 이집트에서 탈출한 이스라엘 백성의 모든 이목이 모세의 후계자로 지목된 여호수아에게 집중됩니다. 이스라엘 백성, 3백만 명이 여호수아 한 사람만 바라봅니다. 여호수아는 자신도 딱 한 번, 그것도 40년 전에 정탐했던 가나안 땅으로 이들을 인도해야 합니다. 이것은 모압 평지에서 가나안 땅까지 걸어서 도착하면 끝나는 단순한 여정이 아닙니다. 요단강을 건너야 합니다. 가나안 땅의 첫 성, 견고한 여리고 성을 점령해야 합니다. 가나안 땅에 오래전부터 거주하고 있는 일곱 족속을 격파해야 합니다. 일곱 족속 중에 네피림의 후손인 아낙 자손의 거인들도 있습니다. 그래서 여호수아는 두렵습니다.
혹시 여러분도 여호수아 장군처럼 앞에 닥친 문제 때문에 약해져 있고, 주눅 들고, 두려워하고 놀라고 계십니까?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말씀을 지금 우리에게도 하십니다. “강하고 담대하라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라” 오늘 하루도 강하고 담대하십시오.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마십시오. 하나님이 여호수아에게 하셨던 것처럼 당신과 함께하십니다.
•오늘의 기도
하나님, 문제 앞에서 두려워하지 말며 놀라지 말게 하옵소서. 강하고 담대하게 하옵소서.
[수요일]
주님의 뜻을 이루소서 / 사무엘상 1:1~8 / 찬송: 425장
황 빈 목사 (강성교회)
주님을 믿고 하나님 백성된 자들에게도 불행한 일이 생길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았으면 하는 것이 우리의 바람이지만, 현실은 다릅니다.
엘가나에게는 두 명의 아내가 있습니다. 한나가 아이를 갖지 못하자 브닌나를 둘째 아내로 들인 것입니다. 자녀를 낳지 못한 한나와는 달리 브닌
나는 남편 품에 자녀를 안깁니다. 그렇다고 한나를 향한 남편의 사랑은 줄지 않습니다. 그럴수록 브닌나는 한나를 격분시키고 괴롭힙니다. 한나는 하나님 앞에 나가 눈물을 쏟습니다.
도대체 왜 한나는 아이를 낳지 못한 것일까요? 이 질문에 본문은 뜻밖의 답을 제시합니다.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니”(5하), “여호와께서 그에게 임신하지 못하게 하시므로” 한나가 겪고 있는 모든 불행과 눈물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것임을 본문은 반복 확인시켜 줍니다.
물론 한나를 통해 장차 사무엘이 태어날 것이며, 그 때에 그녀의 눈물은 환한 미소로 바뀔 것입니다. 그러나 기쁘고 위대한 일이 이루어지기 전, 한나는 하나님께서 ‘의도하신’ 시련의 시간을 견뎌야 했습니다. 우리도 비슷한 일을 겪을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 불행이 엄습할 때, 주님의 뜻이 이루어지기까지 기도로써 인내하며 소망 가운데 기다리는 우리 모두가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겪는 시련에 담긴 주님의 뜻을 깨닫게 하시며, 성령의 능력으로 끝까지 이기는 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목요일]
정결한 경건 / 야고보서 1:19~27 / 찬송: 264장
신성훈 목사 (신일교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복음을 주시고 신앙을 주신 궁극적인 뜻은 우리의 경건함에 있습니다. 본문은 경건의 두 특성을 말합니다.
첫째는 진실한 경건입니다. 복음적 경건은 말씀 안에서 진실함이 생명입니다. 말씀을 행하는 자가 되기 위하여 그 말씀 앞에 귀를 열고 “영혼을 능히 구원할 말씀을 온유함으로” 듣는 수련이 먼저 필요합니다. 그 말씀 앞에 모든 완고함, 혈기, 오만과 산만함을 다 내려놓고 유순하게 진리를 받는 경건의 수련은 필수적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온유함으로 받아야 들을 수 있으며 받을 수도 있습니다. 본문 19절은 우리 언어생활에서 ‘속히 듣고 더디 말하기’를 강조합니다. 성급한 말이 흔히 성내기로 이어지기 때문입니다. 또한 말씀을 언제나 듣기만 하는 것으로 그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행함과 실천을 위해 주어지는 것이므로 “말씀을 듣기만 하여 자신을 속이는 자가 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둘째는 정결한 경건입니다.
경건은 분명 수평적 차원이 있습니다. 수직적 예배 외에 고난 받고 소외되고 무력한 약자에게 관심을 갖는 것입니다. 자기를 세속에 물들지 않도록 지키는 것도 정결한 경건입니다. 이 세상은 온통 우리를 물들게 하는 원천입니다. 세상에 살면서 약자를 돌아보면서 오직 은혜 안에서 경건을 집중 수련할 때 경건의 기적과 능력은 가능할 것입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 경건이 은혜 중 진실하며 능력 있고 정결할 수 있게 하소서.
[금요일]
더 착한 일 / 고린도전서 9:15~17 / 찬송: 205장
김영수 목사 (소풍교회)
선한 사마리아인은 분명 착한 사람입니다. 그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어려움을 호소하는 이웃에게 우리도 최고의 자비를 베풀 수 있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런데 선한 사마리아 사람보다 더 착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은 ‘복음을 증거’하는 사람입니다. 이 땅에서 우리는 영원히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으로 정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고 믿음으로 산다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영원한 하나님 나라의 백성입니다. 이웃을 향한 선일 일은 땅에서 이웃의 연약함을 돌보는 귀한 일이라면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는 너무 귀한 일입니다.
우리가 천국이 어떤 곳인가 잘 알고 확신한다면 복음을 증거할 수밖에 없습니다. 복음을 증거함으로 지옥에 갈 사람이 천국에 간다면 이처럼 귀하고 착한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래서 오늘 본문 16절의 말씀을 보면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이라고 바울은 고백하고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이웃의 연약함을 돌보는 일도 착한 일이지만 복음을 증거하는 일은 더 착한 일입니다. 오늘 복음을 증거하지 못한 우리 마음에 슬픔이 깃들어 있어야 합니다. 영혼을 사랑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길 축복합니다.
•오늘의 기도
영혼을 사랑함으로 복음을 증거하며 살게 하소서.
[토요일]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 / 히브리서 3:1 / 찬송: 85장
피은혜 목사 (새창원은혜교회)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어릴 적 가정예배를 드릴 때 불렀던 찬송가 가사는 먼 옛날이야기 같이 느껴집니다. 현대의 가족들은 함께 밥 먹는 시간이 손꼽힐 정도로 분주한 일상 속에서 놓치고, 잃어버리는 것이 너무나 많습니다.
유월절을 위해 예루살렘에 갔던 예수님의 부모님도 그가 동행 중에 있는 줄로 생각하고 하룻길을 갔다가 사흘 후에야 성전에서 예수님을 찾습니다.
오늘 본문은 “믿는 도리의 사도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누구십니까? 첫째, 예수님을 사도라고 말씀하십니다. 사도는 ‘보내심을 받은 자’, ‘하나님이 보내신 자’로 하나님께서는 그분의 뜻을 크게 드러내실 분으로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둘째, 대제사장이십니다. 대제사장은 큰 임무가 있습니다. 사람을 하나님이 사랑하는 존재로 인도하는 것, 즉 자신의 백성으로 여기시도록 신앙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행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잃은 우리의 삶은 불안정하고, 폭풍 속에 배처럼 흔들리며, 성공할 수도 없습니다. 예수님을 우리의 삶 속에서 먼저 찾고, 그분께 다시 나아가야 합니다.
사순절입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가운데 잃어버린 주님의 은혜를 회복하는 사순절이 되시길 바랍니다.
•오늘의 기도
우리가 사순절의 소중한 시간들을 통해 예수님의 사랑을 찾게 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