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동안 신문, 잡지, 학술지 등에 많은 글을 실었다. 그때마다 그 글에 대한 반응이 나타났다. 학술지에 실린 글은 전공분야가 같은 분들의 반응이었고, 신문이나 잡지에 실린 글은 일반 교양인이나 지인들의 반응이었다. 그런데 그 반응은 아주 다양하였다.
한국의 고소설이나 민속, 신화·전설·민담에 관한 글일 경우에는 한국문화의 전통이나 가치관, 지혜에 관한 느낌을 말해 주었다. 교육에 관한 글일 때에는 교사들이 느낌을 말해 주었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글일 경우에는 기독교 교우들이 자기의 신앙 체험과 주님의 은혜에 관한 반응을 보여 주었다. 이러한 반응은 다른 글을 쓰는 데에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요즈음 「은혜의 샘물」 코너에 실린 글에 대한 반응은 ‘감동을 받았다’, ‘주님의 은혜에 감사한다’, ‘깨달음을 얻었다’ 등으로 다양하였다. 이것들은 모두 지인들이 대면이나 전화, 또는 카톡이나 문자 메시지로 받은 반응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의외의 인물로부터 반응이 왔다. 지난 1월 첫째 주일에 일찍 교회에 가니, 모르는 사람한테 온 편지가 주보함에 꽂혀 있었다. 보낸 사람의 주소를 보니, ‘경북 포항시 흥해우체국 사서함’이라 쓰여 있고, 발신인은 모르는 사람의 이름이 적혀 있다. 수신인은 ‘장위교회 최운식 장로님께’라고 쓰여 있는 것으로 보아 나에게 온 우편물인 것은 틀림이 없었다. 그래서 뜯어서 사연을 읽었다.
첫 구절은 ‘하나님의 사랑을 전하시기에 여념이 없으실 장로님께 이렇게 번거로운 서신을 드리게 되어 정말 부끄럽고 죄송한 마음입니다’로 되어 있었다. 그리고 이어서 현재 경북 포항시에 있는 포항교도소에 수감 중인 사람이라면서 나이와 수인번호와 이름을 적었다. 60대 중반인 그는 노안으로 인해 신문과 책을 보는 등 일상생활에 불편함이 많아 안경이 절실하게 필요하단다. 그런데 가족과 지인이 없어서 경제적으로 힘든 처지라고 하였다. 그러니 안경을 구입할 돈 7만 원을 보내달라고 하면서 교도소에서 사용하는 은행 계좌번호를 적었다.
그는 우연히 <기독교연합신문>을 보다가 「은혜의 샘물」 코너에 실린 ‘목사 아들을 둔 부모’란 제목의 내 글을 읽었다고 한다. 그는 내가 나가는 장위교회가 자기가 사는 곳 근처에 있다는 말도 하였다. 이로 보아 그는 서울의 북부 지역에 사는 사람인 것 같다. 그래서 내가 다니는 교회 이름에 친근감을 느꼈던 것 같다.
나는 이 편지를 읽으며 <기독교연합신문>이 교도소에 들어간다는 것을 알았고, 들어간 신문을 수인들이 찬찬히 읽는다는 것에 적이 놀랐다. 그가 이 글을 읽고 도움을 청할 대상으로 나를 고른 것은 맞다. 그러나 그는 부족한 내 글을 읽고 ‘반가운 마음과 함께 공손한 마음이 들었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목사 아들을 둔 부모와 목사가 된 아들의 마음과 신앙심이 그의 마음에 전달되었음을 짐작할 수 있겠다.
그의 편지는 문장이 바르고, 표현이 적절하였으며, 맞춤법과 띄어쓰기도 잘 하였다. 글씨는 달필은 아니었지만, 읽기에 불편함이 없었다. 그리고 도움을 청하는 말의 앞과 뒤에 인사치레를 잘 하였다. 이로 보아 학력과 교양 수준이 높은 사람인 것 같다. 이런 사람이 무슨 일로 교도소 생활을 하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편지의 내용으로 보아 그는 예수를 믿는 기독교인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기독교에 관해 열린 마음을 갖고 있는 것은 알 수 있다.
나는 그가 적어 보낸 계좌번호로 돈을 보내며 간절히 기도하였다. “하나님, 그가 이 돈으로 안경을 맞춰 쓰고 밝아진 눈으로 신앙에 관한 글과 성경을 읽고, 예수님의 사랑과 가르침을 받아들여 신앙생활을 하게 해 주십시오.” 나는 이 기도가 이루어 질 것이라 믿는다.
기독교 신앙에 관한 글은 많을수록 좋다. 그러나 정제되지 않은 글이나 신앙을 강요하는 느낌의 글은 읽기를 회피하게 만드는 핑계를 만들어준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좋은 글은 많이 써서 널리 보급해야 한다. 이런 글은 설교 못지않게 마음을 움직이는 힘을 발휘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