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의 문 “괜찮아요!”
상태바
관용의 문 “괜찮아요!”
  • 이의용 교수
  • 승인 2023.12.21 18:3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이의용의 감사행전 (65)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이의용 /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언젠가 방송에서 ‘격대교육(隔代敎育, grandparenting)’ 특집을 시청한 적이 있다. 부모가 가르치는 게 ‘당대(當代)교육’이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손주들을 가르치는 게 ‘격대교육’이다. 아이들 교육은 당대교육과 격대교육이 함께 어울어져야 효과가 있는데, 핵가족화로 그런 여건은 사라진 지 이미 오래다. 어린 시절 조부모와 함께 살아본 이들은 그 중요성을 실감할 것이다.

그 방송에서는 세계적인 인재로 활동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만나, 그들이 어린 시절에 어떤 어려움을 겪었고 그걸 어떻게 극복했는지를 물어봤다. 그들에게 가장 큰 힘이 되어준 건 조부모의 “괜찮아!”라는 한 마디였다. 아이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아이를 처음 길러보는 부모들은 함께 낙담을 하거나 아이에게 꾸중을 하기 쉽다. 그러나 이미 한 세대 먼저 자식을 길러 본 조부모들은 “괜찮아!”라는 지혜의 말로 그 상황을 덮어준다. 아무래도 부모보다는 조부모의 시야가 넓고 세상을 보는 관점도 높을 것이다.

칭찬과 격려는 쓰임새가 다르다. 잘하고 있을 때 더 잘하라고 하는 게 칭찬이라면, 잘못하고 있거나 힘들어할 때 잘못을 덮어 주며 잘하라고 하는 게 격려다. 주님은 세 번이나 자신을 배반한 베드로를 갈릴리 새벽에 찾아 가신다.(요한복음 21장) 그러나 주님은 그를 꾸짖거나 따지지 않으시고 오히려 생선 숯 불고기를 만들어 주신다. 그게 격려다. 

격려의 뿌리는 용서라고 생각한다. 용서(容恕)의 ‘용(容)’은 ‘받아 들인다(收容)’, ‘서(恕)’는 ‘마음(心) 가는 대로(如) 한다’는 뜻이다. 잘못을 꾸짖거나 벌하지 않고 덮어 주는 게 용서다. ‘용서’를 가리키는 히브리어 ‘하말’이나, 헬라어 ‘아폴뤼오’, ‘카리조마이’도 뜻이 비슷하다.

창세기 45장에는 요셉이 자신을 노예로 팔아먹은 형들을 용서하는 극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는 “하나님이 나를 형님들보다 앞서서 보내신 것은, 하나님이 크나큰 구원을 베푸셔서 형님들의 목숨을 지켜 주시려는 것이고, 또 형님들의 자손을 이 세상에 살아남게 하시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실제로 나를 이리로 보낸 것은 형님들이 아니라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이 나를 이리로 보내셔서, 바로의 아버지가 되게 하시고, 바로의 온 집안의 최고의 어른이 되게 하시고, 이집트 온 땅의 통치자로 세우신 것입니다”라며 형들의 잘못을 덮어준다. 이어서 “그러니 형님들은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내가 형님들을 모시고, 형님들의 자식들을 돌보겠습니다”라며 형들을 위로한다. 요셉은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본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세상 바라보기
요셉처럼 하나님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바라볼 때 용서가 가능해진다. 그래서 주님은 십자가 위에서도 죄인들을 용서하셨다. 스데반도 주님을 따라 했다. 손양원, 만델라, 김대중, 코리텐 붐 같은 이들도 그랬다. 얼마 전 윤성여 씨는 20년간이나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고도 자신을 가둔 수사관들을 용서했다. 이런 이들의 눈높이는 다른 사람보다 훨씬 높은 것 같다.

성경은, 인간은 끝없이 죄를 짓고 하나님은 그걸 끝없이 용서하시는 이야기책 같다. 예수님께서 가장 강조하신 말씀이 이웃 사랑인데 그 최고점이 ‘용서’가 아닌가 싶다. 주님께서는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우리 잘못을 용서해 주실 것이라며 이웃을 용서하라고 강조하신다.(마가복음 11:25) 그럼에도 우리는 그렇게 하지 못하고 산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만 그런 게 아니라 기독교의 역사가 그랬던 모양이다. 그래서 볼테르는 기독교를 이렇게 비판한다. “모든 종교 중 기독교는 의심할 바 없이 관용을 가르치는 종교다. 그러나 현재까지 기독교도는 모든 인간들 중에서 가장 관용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용서하지 않는 것은 다른 사람에게 던지려고 뜨거운 석탄을 손에 쥐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말이 있다. 결국 화상은 내가 입게 된다. 용서는 상대방에게 베푸는 자선이 아니라, 남의 잘못에서 내가 좀 더 자유로워지고자 하는 날갯짓이다. 용서는 과거에 대한 일이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향한 일이다. 

억울함, 분노, 미움, 원한, 원망, 복수심 같은 것들은 ‘과거’의 사생아들이다. 여기로부터 멀어져야 현재와 미래에 내가 살아갈 수 있다. ‘용서’까지는 이르지 못하더라도 좀 더 ‘관용(寬容)’하며 살아야 겠다. 그 관용의 문은 “괜찮아요!”다.

(사)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