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자들조차 ‘오지’로 부르는 깡촌 시골에 세워진 ‘영적 파수꾼’
복음 처음 접한 어르신들에게 빨래·청소·반찬나눔 등 섬김사역
6년간 세례자 수 7명…작년 새 성전 건축으로 주민들 마음 활짝
“우리 교회를 찾아온 사람들은 세 가지에 놀랍니다. 아직도 우리나라에 이런 ‘오지’가 있다는 것, 이런 오지에 ‘교회’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런 교회에 ‘젊은 목사 부부’가 사역하다는 것이죠. 교회가 자리한 강원도 덕천리를 두고 누군가는 3일짜리라고 말합니다. 잠시 쉬어가기엔 좋지만 오래 살 동네는 아니라는 뜻이에요. 실제로 여기서 지내려면 참 많은 걸 참고 포기해야 합니다. 그렇지만 ‘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을 구원할 수만 있다면, 이보다 더 큰 기쁨이 어디 있을까요?”
6년 전 하나님의 부르심에 우직하게 순종해 깊은 산골에 둥지를 틀고 복음의 씨앗을 뿌리기 시작한 덕천교회 최기수 목사(47)의 고백이다. 목회자들조차 ‘선교지’라고 부르는 첩첩산중에서 이름도 없이 빛도 없이 묵묵히 예수님의 사랑을 전해온 그 덕분에 복음의 불모지였던 덕천리에서는 지금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오는 ‘기적’이 일어나고 있다.
먹이고 입히시는 주님의 은혜
강원도 정선에서 한 시간을 더 들어가야 하는 덕천리에는 평생 복음을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어르신들이 대부분이다. 2018년 3월 이태식 목사의 후임으로 덕천교회 제2대 담임목회자로 부임한 최 목사는 “고향 영월에 살면서 이런 오지가 있는 줄은 몰랐다”며, 매 순간 절박한 심정으로 집집마다 예수님을 증거한다.
그 흔한 치킨 배달은 물론 택배조차 오지 않는 깡촌 시골마을. 도심에선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이곳에 그가 목회의 뿌리를 내린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이 물음에 답을 찾고자 때는 신학도의 길을 걷기로 결단한 2008년경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 궤양성 대장염으로 대장을 절제할 뻔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로 수술을 면하고 자연 치유를 받은 시기였다. 병을 고쳐주시면 주의 일에 헌신하겠다고 다짐했지만 막상 초등학생 자녀 둘을 책임져야 할 형편에서 최 목사는 생업을 그만 두기란 쉽지 않았다.
그러나 하나님의 강권적인 이끄심을 막을 순 없었다. 기도원에서 여호수아 1장 9절 말씀을 받은 뒤, 결국 사표를 낼 작정으로 출근한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처리 된 것. 신학할 환경을 열어달라던 기도에 대한 뜻밖의 응답이었다.
이듬해 서른세 살 조금은 늦은 나이에 칼빈대학교 신학부에 입학한 최 목사. 이때부터 힘에 겹도록 시린 광야 생활 10년이 펼쳐졌다. 그가 교육전도사로 받는 사례비 50~70만원과 아내가 약국에서 벌어온 월급 100만원이 네 식구 생활비의 전부였기에 재정적 어려움이 상당했다.
“하나님이 부르셨으면 순탄대로를 달려야 하는데 현실은 너무 힘들었어요. 여기 저기 빌린 돈을 못 갚아서 욕을 먹고 집이 경매에 넘어간 적도 있었죠. 근로장학금을 받기 위해 어린 동기생들 틈에 끼어 기숙사 청소와 총학생회 간부 등을 마치 생존 경쟁처럼 도맡아 버텼습니다.”
최 목사도 연약한 인간인지라 이따금씩 당장이라도 신학을 접을까 고민도 했다. 더욱이 불신자였던 아내의 친정 가족들은 “처자식 내팽개치고 신학에만 몰두한다”며 사위를 원망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포기하지 않은 이유는 때를 따라 공급하신 주님의 만나 때문이었다.
“하루는 기름값이 없어 강원도에서 서울의 학교까지 가는 길 휴게소에 차를 대고 울며 기도하고 있었어요. 그런데 지나가던 어느 권사님이 제게 와서 5만원을 건네주는 겁니다. 그때 하나님은 늘 나를 돌보시고 보호하시고 인도하신다는 걸 깨달았습니다.”
돌아 보면 그때만큼 간절히 하나님께 부르짖으며 매달린 적이 없었다는 최 목사는 “혹독했던 광야 신학교 10년은 하나님이 먹이고 입히시는 은혜의 시간이자 모든 걸 맡기는 훈련의 기간이었다”며 “덕분에 지금 험난한 덕천리에서도 사역할 수 있는 것 같다”고 웃어 보였다.
한편, 신대원 졸업 후 부임지를 놓고 기도하던 중 최 목사는 덕천교회 전임 이태식 목사로부터 청빙 제안을 받았다. 말이 좋아 청빙이지 실상 덕천리가 워낙 낙후된 지역이라 6년째 후임자를 구하지 못하고 있다는 이태식 목사의 말이 그에게는 하나님의 음성처럼 다가왔다. 결국 3일 금식기도 끝에 최 목사는 덕천교회에 한 번 가보지도 않고 부임을 결정했다.
“제가 신학대에 입학할 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사용해 주옵소서. 아골 골짝 빈 들이라도 주를 위해 복음 들고 가겠나이다’라고 고백했거든요. 본질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뿐 이 외의 모든 환경은 다 비본질적인 거잖아요.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는 복음의 사명자로 결단한 이상 다른 어떤 조건들은 대수롭지 않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아내와 손 잡고 내비게이션에도 찍히지 않는 교회를 처음 방문한 최 목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사택조차 따로 없던 덕천교회는 200년 된 흙집으로 스러지기 직전의 상태였습니다. 춥기는 얼마나 춥던지요. 아무리 시골교회라도 이 정도일 줄은 몰랐는데, 아차! 싶었죠.”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아내는 3일을 몸져누웠다. 그도 그럴 것이 아내도 ‘남편이 신학만 마치면 좋은 교회에서 사례 걱정 없이 적당한 성도들과 행복한 목회를 하리라’는 기대가 있었을 텐데, 덕천교회를 본 순간 10년간의 꿈이 와르르 무너져 내린 기분이었을 터다.
“그런데 꼬박 3일째 되던 날 아내가 자리를 털고 일어나더니 ‘사모 역할에 올인하기 위해 약국을 관두겠다’는 게 아니겠어요. 요한일서 3장 18절 ‘자녀들아 우리가 말과 혀로만 사랑하지 말고 오직 행함과 진실함으로 하자’는 말씀에 위로를 받은 아내는 고생이 불 보듯 뻔하지만 이것 때문에 주저 앉으면 진짜 주님을 사랑하는 게 아니라고 여겼대요. 하나님께서 나를 덕천리에 영적 파수꾼으로 세우심은 이 정도 되는 아내가 옆에 있기에 가능했구나 생각했습니다.”
주린 양을 먹이는 섬김 사역
2018년 3월 4일 덕천교회 사역은 이렇게 시작됐다. 그러나 새로운 터전은 지난 세월의 연단이 무색할 만큼 충격적이었다. 자녀들을 기숙학교에 보내고 아내와 들어선 덕천교회는 200년 된 흙집답게 야생 그대로였다. 사방에 뱀과 쥐, 각종 벌레가 우글거리는 건 예삿일이었다.
여름에는 기온이 46도에 육박할 정도로 푹푹 찌는 폭염에 겨울은 매서운 한파가 뼛속까지 파고들었다. 처음 몇 달은 하루 종일 쓸고 닦고 지쳐 잠드는 게 일상이었다는 부부는 밤이 되면 칠흙 같은 어둠 속에서 반짝이는 밤하늘의 별을 보면서 서로 부둥켜안고 하염없이 울었다.
주민들의 텃세도 심했다. 산과 나무를 섬기는 우상숭배가 만연한 까닭에 주민들은 목사와의 대화를 부정타는 일로 여겼다. 영적전쟁도 치열했다. 서낭당을 관리하는 무당이 “마을의 모든 문제는 교회가 들어왔기 때문”이라며 이간질을 했다. 무당이 굿판을 벌일 때면 목사를 마을에서 쫓아내야 한다며 사람들을 선동했다. 전도용품을 그의 뒤통수에 던지는 경우도 있었다.
“대인관계에 트라우마가 생길 정도로 처음엔 상처도 컸습니다. 그러면서 ‘목양이 무엇일까?’를 두고 몇 달간 묵상했죠. 그때 하나님이 부어주신 지혜는 ‘네 양을 먹이라’였어요. 주님이 그토록 애타게 찾으시고 제게 맡겨주신 한 영혼을 먹이고 함께 살아가는 것, 성도들의 삶이 곧 내 삶이 되는 것이 비로소 나의 목양임을 깨달았습니다.”
최 목사는 곧장 ‘전도’와 더불어 ‘심방’을 시작했다. 그러나 가까이서 들여다본 성도들의 삶은 훨씬 더 처참했다. 누울 자리 외에는 온통 잡동사니와 쓰레기로 가득한 집안부터 썩은 간장과 밥을 먹으며 영양실조에 걸린 노인들이 허다했다. 자식들도 외면한 채 아파도 병원조차 갈 수 없는 비참한 현실에 가슴이 아려왔다.
그는 “심방을 다니다 보니 어르신들에게 필요한 게 하나 둘 눈에 들어왔습니다. 우선 한주에 두 끼라도 제대로 드실 수 있게 ‘반찬’을 만들어 나눠 드렸어요. 가는 곳마다 싱크대와 방을 ‘청소’해드렸고, 버려야 할 이불을 세탁하지도 않은 채 덮고 주무시는 모습에 ‘빨래’도 도와드렸습니다. 매일 반복되는 일상이 우리에겐 ‘섬김 사역’이 된 겁니다.”
힘에 부치는 사역에 원망할 법도 하지만 최 목사는 “물질이 넉넉하지 못한데 오히려 몸으로 떼울 수 있어서 감사하다”며 “덕천교회의 섬김 사역은 어르신들의 삶을 같이 살아내며 끊임없이 복음을 전하는 것이 핵심이다. 하나님이 구원을 예비하고 택하신 백성이 있기 때문”이라고 겸손히 말했다.
하지만 충성된 종을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다. 많은 동역자들과 도움의 손길을 보내주신 것. 사도 바울에게 붙여준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처럼 신실한 어느 집사 부부는 지난 6년간 한 달에 한 번 덕천교회를 찾아 함께 예배를 드리고 있다. 이 밖에 여러 교회의 아웃리치 팀이 덕천교회를 찾아 열정 넘치는 선교를 통해 활력을 선물해주었다.
무엇보다 시골목회의 제일 큰 어려움은 바로 어르신들과의 헤어짐이다. 이별은 고령자들로 가득한 시골교회에서 언제든지 계속 겪어야 할 운명이다.
최옥려 할머니도 그중 한 명이었다. 신우신염으로 방안에 쓰러져 있던 자신을 발견하고 병원으로 데려가 준 최 목사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는 최씨 할머니. 교회에 대해 불평이 가득했던 할머니는 이 일을 계기로 교회에 나와 최 목사의 첫 세례 성도가 됐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현재는 치매를 앓고 요양원에 입원해있는 상황. 지난 연말 코로나19 탓에 어렵사리 면회한 최씨 할머니는 끝내 최 목사를 알아보지 못했고, 이 장면은 기독교방송 CGN 다큐 <시골목사 전원일기>에 고스란히 담겨 수많은 시청자들의 눈시울을 붉혔다.
“어르신들이 덕천리를 떠난 뒤 느끼는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가 없습니다. 성도수가 10명도 안 되는 시골교회에서 한 명의 빈자리는 정말 크거든요. 그 떠난 자리에는 평소 깔고 앉으시던 방석만이 덩그러니 남는데 몇 달간 차마 치우지를 못합니다. 특히 예수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가시는 분들을 생각하면 ‘조금이라도 더 찾아가 복음을 전할 걸’이란 자책과 아쉬움이 밀려옵니다. 성령님의 일하심에 내가 게으르지는 않았는지 회개하게 되죠.”
한 영혼이 주께 돌아오는 기적
지난 6년간 덕천교회의 가장 큰 기쁨이자 감사는 역시 한 영혼이 주께로 돌아온 일이다. 지금 덕천교회는 15명의 성도들이 함께 한다. 이제껏 세례를 받은 성도들도 7명에 이른다.
최 목사는 “올여름 사역에서 전도를 통해 오신 분 중 머리털 나고 처음으로 교회에 참석한 어르신이 여덟 명이나 됐다”며 “대형교회에서 이 숫자는 적을지 모르지만 살면서 단 한 번도 교회에 나가본 적이 없는 어르신들이 대다수인 덕천리에서는 엄청난 수”라고 전했다.
“샤머니즘에 빠져 교회에 나오면 매번 방해하던 분이 예수를 믿고 거듭나는 걸 지켜보는 게 가장 행복합니다. 세례를 받은 어르신들은 ‘이제야 사람 된 것 같다’고 말하는데요. 살면서 이렇게 귀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다는 의미예요. 남편에게 두들겨 맞고 자녀들에게 버림받았는데 예수님의 사랑을 알고 나니 ‘이 좋은 걸 왜 그동안 몰랐을까?’ 싶은 거죠. 한 영혼이 구원받는 기쁨과 그 가치를 아는 것이 바로 시골목회의 가장 큰 매력입니다.”
여기서 안주하지 않고 덕천교회는 힘찬 발걸음을 거침없이 내딛고 있다. 하나님은 지난해 전임 이태식 목사의 오랜 기도제목이자 숙원사업이던 ‘새 성전’ 건축도 허락해 주셨다.
발단은 2019년 막내딸을 얻으면서다. 사정을 아는 모 교회 권사님은 “이토록 열악한 환경에서 아기를 어떻게 키우냐”며 리모델링을 제안했고, 이 과정에서 주님은 ‘재건축’이라는 놀라운 섭리로 인도하셨다. 십시일반 후원금이 모였고 교단을 초월한 목회자 및 사모 40여명이 뜻을 모아 건축에 동참했다.
그렇게 2022년 5월 덕천교회는 1원의 빚도 없이 ‘성전 건축 감사 및 입당·헌당 예배’를 드리고 하나님께 영광을 올려드렸다. 어느새 이 지역의 랜드마크로 자리 잡은 덕천교회의 새성전 건축으로 마을에도 크고 작은 변화가 일어났다.
“교회가 새로 지어지면서 마을 길의 확장 공사도 병행됐어요. 덕분에 교회를 오는 길이 한결 수월해져 한시름 놓입니다. 무엇보다 교회를 향한 주민들의 ‘시선’이 달라졌습니다. 가진 것 없던 목사가 멋진 교회를 지었다는 사실에 놀라며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간접적으로 체험한 거죠. 어르신들은 이구동성으로 ‘교회가 세워지니까 마을이 환해졌다’고 말합니다.”
최 목사의 진심을 읽은 주민들은 어느덧 든든한 협력자가 됐다. 그는 “젊은 목사지만 마을의 영적 지도자로 여겨주는 이웃 주민들에게 감사하다. 목회에 자신감도 많이 붙었다”며 “이제는 여러 관계 속에서 분쟁이 생기면 도리어 저를 찾아와 중재해 달라고 요청하신다. 목사의 말을 듣고 서로 이해하고 타협하는 덕천리가 되어가는 것 같다”고 귀띔했다.
끝으로 덕천리 지역이 복음으로 하나 되는 마을을 꿈 꾼다는 최 목사는 “우리 교회 어르신 성도들도 누군가를 전도 할 만큼 예배자인 동시에 예수님의 제자로 세워지고 있다”며 “먼 훗날 주님 앞에 섰을 때 많은 사람을 옳은 길로 인도하지는 못 했을지라도 주님이 그토록 찾으시던 잃어버린 양 한 마리를 주께로 인도해 칭찬받고 싶다”고 덧붙였다.
“저는 날마다 주님 앞에 설 ‘결산’의 때를 생각해요. 그때, 주님께서 ‘넌 무엇을 하다 왔니?’ 물으시면 ‘저는 최옥녀 할머니 데리고 왔어요. 양덕순 한덕삼 이창재 배동옥 박순애 박옥분 등등…. 주님이 사랑하시는 영혼 한 명 한 명의 이름을 말할 수 있길 소원합니다. 여전히 부족하지만 주님 앞에 설 날을 고대하며 결산하실 이를 기쁘게 하는 소명자가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