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에도 ‘백석 목사’라는 자부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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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퇴 후에도 ‘백석 목사’라는 자부심”
  • 이형진 목사(낙원교회)
  • 승인 2023.09.21 15:3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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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본 백석총회, 내가 본 장종현 목사 ⑩

주위 사람들로부터 “사명자가 되라”는 권면을 받던 중 저는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응답을 받아야 신학교를 가겠다는 결심으로 수원에 있는 칠보산기도원에 가서 금식기도가 아닌 단식기도를 시작했습니다. 4일째 되는 밤 기도하는 중에 제 귀에 하나님의 음성처럼 창세기 12장 1절에서 3절을 보라는 소리가 들려 산에서 내려와 숙소에서 성경을 펼쳐 읽고는 이것이 하나님의 응답이라고 확신했습니다. 

기도원에서 내려와 어느 신학교를 갈지 고민하던 중 제가 다니던 감리교회에 방배동 총신에서 공부하는 사람이 두 명이나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분들의 권유로 방배동 총회신학에 입학하였고 아내도 신학 공부를 하겠다고 하여 둘이 같이 다니게 되었습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자부심

야간 과정에 등록하여 주경야독을 했는데 결석하는 일 없이 열심히 다녔습니다. 집이 경기도 시흥일 때라 학교 뒷산에 올라 기도를 하는 날이면 밤 11시가 넘어 도착하기도 했지만 피곤한 줄 몰랐습니다. 방학이면 기도원에 가서 밤 기도를 하며 학창 시절을 보냈습니다. 

4학년 때 고 최순직 목사님과 현 총회장님이신 장종현 목사님을 인천으로 모셔서 식사 대접한 적이 있는데 이를 인연으로 졸업 후 개척 설립예배에서 최순직 목사님이 설교를 맡아주신 것이 지금까지 마음에 자랑으로 남아 있습니다.  

제가 방배동 총회 야간 과정을 다닐 때 나이 많은 만학도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특히 인천과 부천에서 다니는 분들과 친분을 맺은 것이 큰 힘이 되어서 학부와 연구원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습니다. 지금 돌아보니 참으로 꿈같은 세월입니다. 

방배동 총회신학 학생들은 기도도 많이 하고 학업에도 열정적이었습니다. 그런 분들과 함께 공부했기에 학교에 자부심이 있었고, 교회 개척에도 자신감을 갖고 임했습니다. 개척하고 3개월이 지나니 교인이 50명이 되었고, 일 년도 채 지나지 않아 백 명이 넘는 성도들과 예배를 드릴 수 있었습니다. 

목회를 하면서도 주위의 졸업생들이 목회를 잘하는 모습에 변함없는 자부심을 느꼈고, 저희 집사람도 동문이어서 협동목회를 한다고 마음으로 사역을 하였습니다. 뒤돌아보면 힘들었던 적도 있지만 모두가 하나님의 은혜였고 저의 저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에다가 방배동 총회산학의 좋은 교수님들과 좋은 인연들을 만난 덕분이었다고 고백할 수밖에 없습니다.

백석총회의 은퇴목사라는 뿌듯함

목회를 은퇴하고 시골로 내려와 살면서도 백석교단 원로목사회의 총무와 회장으로 섬기면서 제 인생 중후반은 백석이 빛내주고 있습니다. 기독교방송의 백석대학교 광고에서 ‘백석총회와 함께하는 대학’이라는 소개를 들을 때마다 백석총회의 은퇴목사라는 뿌듯함에 혼자 웃음 짓기도 합니다.

그리고 천안에 가서 백석대학교를 볼 때마다 이 거대한 백석대학교를 이루어놓으신 장종현 총회장님에게 저도 모르게 머리가 숙여집니다. 저는 가끔 지역 목회자나 지인으로부터 어느 교단 소속이냐고 질문을 받으면 천안 백석대학교와 함께하는 백석총회 은퇴목사라고 자신 있게 말합니다. 

저는 은퇴 후 충청남도 보령시 주교면의 바닷가 마을에 살면서 예수님께서 고기잡이하던 베드로에게 하신 말씀과 씨 뿌리고 농사짓는 비유를 삶으로 경험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아직 전국원로목사회 회장을 맡고 있는 백석인으로서 개혁주의생명신학을 통해 백석총회가 우리나라 교계를 이끌어가고 아시아를 넘어 세계로 개혁주의생명신학을 확장하기를 기도할 뿐입니다. 백석총회 45주년을 진심으로 축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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