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한 평화통일 의지 부족, 내부요인에 함몰
북한의 악한 영 대적, 북녘 동포는 구원의 대상
정전 70년 치유, 성경적 가치로 다시 생각해야
2023년 7월 27일은 한국전쟁 정전협정 70주년이 되는 날이다. 70년 전의 이날은 무슨 의미이며, 70년의 세월은 무슨 의미이며, 앞으로 미래에는 어떤 의미가 되어야 하는가? 이 질문은 정답이 있는 것은 아니다. 정답을 주장하는 것 자체가 넌센스다.
하지만 정답이 없다고 무의미한 것은 아니다. 역사의 한 가운데서 받을 교훈이 무엇인지 고민하고, 역사의 주인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성실함을 보이는 것은 건너뛸 수 없는 의무다. 길가의 풀 한 포기도 의미가 부여되면 가치가 달라지고, 길모퉁이의 돌 하나도 의미가 부여되면 가치가 달라진다.
그렇다면 현재 시점에서 70년 전의 정전협정에 어떤 의미를 부여해야 할까?
한국전쟁과 정전협정은 20세기 한국 역사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주제들이 시들해지고 있다. 우리의 관심이 다른 것에 가 있는 것 같다. 세계 10대 경제 대국, 개발도상국에서 선진국으로 발전한 유일한 사례, 이제 한국이 하면 세계 탑 클래스다. 삼성전자, BTS, K-드라마, K-푸드, K-컬처, K-방산 등 K자가 접두에 붙으면 월드 클래스가 되는 세상이 되었다. 이런 것들은 한국전쟁과 코리아 리스크를 극복하고 이룬 것이어서 의미가 다르다.
이런 발전사에 항상 교회가 있었다. 교회는 일제 점령기와 한국전쟁의 폐허 속에서 깨어있는 지성이고, 앞서가는 그룹이었다. 다양한 분야의 인재들이 교회에서 배출되었다. 대한민국이 세계 정상으로 발돋움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던 교회가 지금은 어떻게 되었는가? 외면받고 있다. 세상이 바뀐 것인가? 교회가 뒤떨어진 것인가? 정전 70주년을 맞이하여 고민할 가치가 있다고 본다. 네 가지 질문을 살펴보자.
첫째, 한반도는 이데올로기의 희생물인가?
분단과 한국전쟁을 냉전시대의 산물이며, 힘이 없어서 억울하게 당한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일면 타당한 근거가 있다. 미국과 소련을 중심으로 한 냉전이 한반도 분단의 원인이 되었다. 한국전쟁도 동서냉전 양상을 띠었다. 하지만 한반도가 희생물이라고 하는 것은 일부 타당성이 있고, 일부 다른 의미도 있다. 한반도가 일제에서 해방된 것은 미국이 일본과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김일성이라는 전범이 있었기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다. 동서냉전의 현장인 한반도에서 일어난 전쟁이기 때문에 동서 진영에서 참전하였다.
그러나 전쟁의 원흉은 동서냉전만으로 설명할 수 없다. 더구나 정전협정은 동서냉전의 덕을 본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이 전쟁을 성과 없이 끝낼 수 없다고 하면서 북진통일을 주장하며 휴전에 반대했으나 따지고 보면 이승만 정권은 스스로 전쟁을 계속할 힘도 없고, 북진통일 할 힘도 없었다. 냉전에 기대어 북진통일을 하려고 한 것이다. 하지만 중국과 미국은 이미 1951년부터 전쟁을 계속할 생각이 없었다. 그렇다면 이승만 대통령의 뜻대로 될 가능성은 없고, 미국과 중국의 의사에 따라 휴전이 되었으며, 한반도는 그 덕에 더 이상 전쟁터가 되지 않을 수 있었다. 정전은 종전이 아니라고 하는데, 사실상 정전의 형식으로 전쟁을 마친 것이다. 결국 냉전 구도 때문에 대한민국은 패전을 면하고, 3년간 전쟁을 수행했으며, 전쟁을 멈추는 것까지 혜택을 본 것이다. 한반도를 이데올로기의 희생물로 보는 것은 타당성이 적다. 오히려 덕을 보았다고 하는 편이 더 타당하다.
둘째, 정전 70년의 역사는 종전이 아니라 휴전이기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는가?
아니다. 한국전쟁을 종전으로 마쳤다면 비극 중의 비극이 되었을 것이다. 종전이란 한쪽이 망해야 끝난다. 정전의 후유증이 얼마나 심각한가? 종전의 후유증은 얼마나 더 심각할까? 정전이 아니라서 한반도는 70년 동안 전쟁 중이었나? 아니다. 한반도의 경제 발전에 발목을 잡았던 코리아 리스크도 휴전 리스크라기보다 분단 리스크라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다. 휴전선에서 벌어진 마찰들도 분단 리스크로 모두 설명이 된다.
그렇다면 한반도가 70년 동안 평화와 통일로 나가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북한이 모두 평화통일로 나갈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말로만 외쳤다. 그동안 남북이 만든 합의서는 제대로 이행되지 않았다. 만일 이행되었다면 한반도의 역사를 달라졌을 것이다. 진자운동만 거듭한 것은 평화 통일로 나갈 의사가 없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남북관계가 발전하지 못한 원인을 북쪽에 떠넘기는 경향이 있다. 맞는 말이다. 그러나 남쪽도 별반 다르지 않다. 평화 통일로 갈 의사가 있었다고 극복할 수 있는 문제들인데도 의사가 없으니 주저앉은 것이다.
셋째, 공산주의의 체제 전환은 자본주의의 승리인가?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이 해체되고, 동유럽 공산주의 국가들이 대거 체제를 전환했다. 지금 공산주의 국가는 중국, 북한, 베트남만 있다. 북한 외에 중국과 베트남은 정치는 공산주의지만 경제는 자본주의다. 특히 동서독이 통일되는 것을 보고 자본주의가 승리했다고 해석하는 학자들이 많다.
그러나 사실은 공산주의가 멸망한 것은 공산주의 체제의 취약성 때문이다. 공산당 독재와 기획경제의 한계에 원인이 있는 것이다. 단지 자본주의는 살아남은 것이다. 자본주의가 살아남았다고 공산주의보다 우월한 것은 아니다. 자본주의도 언제 망할지 모른다. 자본주의는 개인주의, 빈부격차, 차별과 혐오, 대결과 경쟁, 황금만능주의 등 많은 부정적인 요소들을 품고 있다. 생태계 파괴, 기후 위기, 환경파괴의 주범은 자본주의다. 자본주의는 화려해 보이지만 핵폭탄 같은 파괴력을 내재하고 있다. 잘 관리되지 않으면 재앙이 될 수 있다.
정전 70주년을 맞이한 한반도의 북쪽은 핵미사일 개발에 함몰되어 있다. 북쪽에서는 핵미사일 개발 외에 되는 것이 별로 없다. 2천 5백만 인민이 사는 나라에서 핵미사일 개발 하나만 하면 그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가? 남쪽도 마찬가지다. 남쪽은 돈만 안다.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는 사회가 어떻게 건강하게 발전할 수 있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쪽은 핵미사일을 자랑하느라 나라가 망하는 것을 방치한다. 남쪽도 경제적 성과에 취해서 5천년 역사에 가장 큰 전성기가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나라가 망하는 것은 외부 요인보다 내부 요인에 기인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한반도는 내부적 위기에 직면해 있다.
마지막으로 질문한다. 한반도에서 평화와 통일은 가능한가?
이 질문에는 가능하다 혹은 불가능하다고 답할 수 없다. 왜냐하면 남쪽도 북쪽도 평화 통일에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국가의 평화와 안전을 위해 무기를 개발하고, 군사훈련을 하는 게 아니라, 상대를 멸망시킬 수 있는 무기를 개발하고 있다면, 평화 통일에 의사가 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평화 통일이 불가능한 구조는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선악이원론 때문이다. 선악이원론은 하나님과 사탄 사이에만 가능하다. 인간 세상에서는 절대 선도 절대 악도 없다. 선한 일에도 악이 일부 포함되어 있고, 악한 일에도 일부 선이 포함되어 있다. 안타깝게도 한국교회에서는 공산주의를 절대 악으로 규정하면서 스스로 절대 선을 표방하는 예가 많다. 선악이원론의 구조에서는 평화는 없다. 전쟁만 있다. 통일은 악을 용납하는 것이기 때문에 불가능하다. 오직 악을 파괴하는 것만이 선이다.
그러면 선악이원론은 성경적인가? 절대 아니다. 성경은 인류 역사를 구속사라고 한다. 구속사란 악과의 대결의 역사가 아니라, 죄인을 용서하고 사랑한 역사다. 원수를 사랑하고, 원수를 위해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음으로 원수를 가족으로 포용하는 역사다. 중간에 막힌 담을 더 높이 쌓는 것이 아니라 허물어뜨리고 한 가족이 되는 것이다.
성경은 원수 갚은 것은 사람의 일이 아니고 원수를 사랑하는 것이 사람의 일이라고 하셨다. 내가 구원받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것도 결국 같은 경우다. 내 모습 이대로는 멸망으로 떨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랑의 하나님께서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신 것이다.
북한을 지배하는 악한 영을 대적하여야 하지만 2천 5백만 동포들은 구원의 대상이다. 하나님께서 십자가의 사랑으로 구원하시겠다고 하는데, 누가 나서서 멸망시키라고 할 수 있는가? 그런 사람이 하나님과 같은 편에 서 있다고 할 수 있는가? 우리 예수님은 의인을 구하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구하려 오셨다. 우리 주님이 북한의 죄인을 구원하시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탕자도 사랑하시는 하나님은 북한 공산주의자도 사랑하시고, 자녀를 삼으시는 분이시다. 큰아들처럼 동생을 용납하지 못하는 형은 절대 선이 아니다. 허상을 좇는 불쌍한 선일 뿐이다.
우리는 이제 역사와 함께 만들어진 절대 화해할 수 없는 공산주의자들과 평화 통일하는 과제 속에 서 있다. 공산주의자는 용서하지 못하고, 동포들만 포용하자는 논리도 성경적인 것은 아니다. 누가 누구를 용서하는가? 우리에게는 용서를 안 해 줄 권한이 없다. 왜냐하면 우리가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이다. 내가 원하는 것, 내가 하기 싫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을 보아야 한다.
자기반성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평화 통일할 의사가 없다. 정죄할 마음이 가득하다. 북한이 망하라고 기도하는 열정은 하나님의 열정인가? 내 열정인가? 북한이 망하는 것은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다. 그리고 우리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다.
한편 북한 동포 입장에서 생각해 본 적이 있는가? 북한은 한국전쟁으로 미국에 대한 원한을 쌓고 있다. 미국 폭격기가 북한 상공을 가르는 소리에 대한 공포를 아직 갖고 있다. 북한 동포들은 남쪽을 남조선 괴뢰로 기억하고 있다. 그들도 경험에 근거하여 그런 생각을 키워왔다.
그렇다면 우리가 평화 통일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입장 바꿔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것 하기 싫으니까 분단된 지금 이대로 살자고 하는 사람도 있다. 분단은 그 구조 자체가 상당히 위험한 구조다. 언제든지 충돌할 수 있기 때문에 안전한 구조가 아니다. 그런데 내가 편하자고 이 구조를 그대로 유지하자는 것은 소인배다. 북한에 대한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다른 사람들의 트라우마를 치료해주고, 한반도에 평화 통일의 가치를 심고 가꾸고 열매 맺게 할 수 있는 씨앗은 성경에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교회는 그것을 할 힘이 없다.
정전협정 70주년을 맞은 지금 우리는 한반도에서 다시는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평화와 통일로 나아가야 하는 과제 앞에 있다. 70년의 경험으로 볼 때, 평화와 통일은 외친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평화 통일을 방해하는 요소들을 인정하고, 치료하는 과정이 선행되어야 한다. 이 치료 과정은 남쪽에서도 북쪽에서도 이루어져야 한다.
북한선교와 북한교회 재건에 대해서도 주의할 것이 있다. 이 문제는 북한을 향한 하나님의 뜻이 첫 번째이고, 북한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은혜가 두 번째이며, 한국교회와 세계교회의 북한선교는 세 번째가 되어야 한다.
앞으로 한국교회가 북한선교를 더 잘하려면 멈춰서서 생각해야 한다. 70년 역사의 상처들을 잘 치유하고, 선입견 없이 성경적 가치를 가지고 다시 생각해야 한다.
이수봉 박사 / 하나와여럿통일연구소장 기독교통일학회 부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