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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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를 위한 신·구약 연구(7)
  • 승인 2004.09.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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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진의 신약 읽기

사복음서 <7> 순종의 사람 요셉

예수의 탄생 이야기는 누가복음과 마태복음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왜 동일한 탄생 이야기가 다르게 기록되어 있는 것일까? 첫번째 요소는 누가복음의 기사는 마리아의 관점에서 기록된 반면, 마태복음은 요셉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누가복음에서는 천사가 마리아에게 나타나 그녀의 잉태와 메시아의 탄생을 예언하지만(눅 1:26~38), 마태복음에서는 요셉에게 나타나 동거하기 전 잉태한 것으로 드러난 마리아를 데려오도록 분부하고 또 그에게 메시아의 탄생을 예고한다(마 1:18~21).

또한 탄생 기사 이후 일련의 사건에서도 마태복음은 항상 요셉을 중심으로 사건이 전개됨을 말하고 있다(마 2:13~18, 19~23). 아울러 누가복음에서 마리아와 요셉의 이름이 등장하는 비율은 9:2인 반면, 마태복음에서는 5:3으로 요셉이 더 많이 등장한다. 마태복음에서 이처럼 요셉을 더 부각시키는 이유 중 하나는 예수를 다윗의 자손으로서의 메시아로서 제시하려는 까닭이다. 다시 말하면 법적으로 요셉의 아들이 됨으로써, 다윗의 법적 혈통을 이어받은 다윗의 자손으로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말이다.

이런 맥락에서 마태복음은 주님의 육신의 부친이었던 요셉을 ‘의로운 사람’으로 묘사한다(19절). 여자가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 임신했다면, 그것은 간음한 것이고, 그 경우 율법은 돌로 쳐 죽이도록 명하고 있는데(신 22:23~24), 요셉은 이를 알고도 가만히 끊고자 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요셉은 천사의 분부에 순종하여, 남들의 이목에 개의치 않고, 동거 전 임신한 마리아를 기꺼이 데려왔고, 첫 아들 예수를 낳을 때까지 동침하지도 않았다(25절). 또한 꿈을 통해 하나님의 사자의 지시를 받아 아기 예수를 보호하기 위해 애굽으로 내려갔다가(마 2:13~15), 헤롯 대왕이 죽자 거룩한 모자(母子)를 다시 애굽으로 인도하여 함께 나사렛에 정착하게 되었다(마 2:19~23).

비록 그가 탄생 기사 이후에는 다시 등장하지 않아 대개는 일찍 죽은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예수께서 어릴 적에는 위험과 불편을 무릅쓰고 성(聖) 모자를 보호하였고, 또한 직업이 목수였고(마 13:55), 따라서 맏아들이었던 예수에게 그 기술을 전수하여 주님 역시 목수로 알려졌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는데(막 6:3), 그렇다면 맏아들에게 기술을 전수하여 가족을 부양할 수 있도록 배려한, 매우 가정적인 인물임을 알게 된다.

이러한 일련의 사실들을 참작할 때, 요셉은 약혼녀의 혼전 임신을 조용히 덮어버리고자 할 만큼 착한 사람이었고, 아울러 천사의 분부를 들었을 때 이를 거절하지 않고 흔연히 순종한 믿음의 사람이었던 것이다. 물론 누가복음에 기록된대로 결혼 전 잉태를 순순히 받아들인 마리아의 신앙도 위대하지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요셉 역시 위대한 인물임을 확인하게 된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착하고 말씀에 순종적인 사람들을 통해 위대한 구속사역을 이행하셨고, 오늘날도 마찬가지로 요셉과 같은 이들을 통해 위대한 사역을 이루어 가신다.

/교수·천안대 기독신학대학원

박종수의 구약 읽기

모세오경 <7> 홍수 이야기

여러 세대를 지나는 동안 인간 세상은 타락하게 되는데 노아라고 하는 사람만이 깨끗한 사람으로 남는다. 하나님이 죄로 가득 찬 인간 세상을 보고 세상을 지은 것을 한탄했다고 한다(창 6:7). 그 한탄은 인간에 대한 심판으로 이어지고 홍수로 구체화된다. 아득한 옛날 사람들은 물난리를 크게 겪었음이 분명하다. 과학이 고도로 발달한 오늘날에도 홍수 피해는 계속되고 있고 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고 있다. 하물며 자연에 대해 무방비 상태에 있던 옛날 사람들에게 물의 위력이야말로 얼마나 클 것인가?

홍수로 인해 전 인류가 멸종당할 위기에 처했다는 이야기가 고대 근동을 비롯해 세계 도처에 널리 퍼져 있다. 이스라엘은 당시 근동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여겨진다. 인류가 대홍수(大洪水)로 인해 멸망당하지만 오직 한 사람이 살아남아 후손을 남기게 되어 다시 오늘날과 같은 세상이 되었다는 것이 홍수 이야기의 전말이다. 결국 홍수 이야기는 인류의 제2 시조(始祖)에 대한 이야기임을 알 수 있다.

성서의 홍수 이야기는 바벨론의 길가메쉬 서사시(Gilgamesh Epic)에 홍수 이야기와 매우 유사하다. 다른 점이 있다면 등장 인물의 이름과 신(神)의 명칭이 다르다. 바벨론의 이야기는 으레 다신교적(多神敎的)인 사고에서 전개되며 성서의 홍수 이야기는 유일신적인 사고에서 전개된다. 하지만 엄밀히 따진다면 성서 이야기 역시 두 개의 기사가 섞여 있다. 어떤 곳에서는 모든 동물의 암수 한 쌍이 노아의 방주에 들어갔다고 말하는가 하면(창 6:19), 다른 곳에서는 정결한 짐승 암수 일곱씩, 부정한 것은 암수 둘씩 들어갔다고 보도한다(창 7:2). 성서는 때로는 질서정연한 구조로 이야기를 전개하는가 하면 이처럼 가끔 상이한 내용이 한 이야기 안에 얽혀 있는 경우도 있다.

홍수가 끝나고 하나님께서는 무지개 언약으로 다시는 홍수로 인간을 멸하지 않으시겠다고 약속하신다. 노아는 다시 농업을 시작해서 포도나무를 심었다. 포도주를 만들어 먹은 노아는 자신이 벌거벗은 줄도 모르고 잠을 자고 있다. 이를 본 함이 셈과 야벳에게 고하자 그들이 옷으로 아비의 하체를 가렸다는 이야기가 소개된다. 자기도 모르게 우연히 아비의 하체를 본 함(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형제의 종이 되고(창 9:25), 셈과 야벳은 장수했다는 것이다(창 9:20~29).

아무 죄가 없는 가나안이 왜 저주를 받고, 왜 형제의 종이 되어야 할까? 옛날에는 형제끼리도 주인과 종이 될 수 있었는가? 여러 가지 의문이 제기될 수 있다. 하지만 성서 기자의 의도는 단순하다. 지금 당면하고 있는 가나안 사람들은 원래 자기들의 형제였다는 것이다. 그들은 적어도 왕국 시대 이전까지는 한데 어우러져 살았다(룻 1:1~5). 그러다가 가끔 가나안의 원주민과 불화도 있었을 것이며 그들과 싸울 때도 많았다(창 34장). 가나안의 종교가 여호와 신앙을 위협하면서 이스라엘과 가나안 사람들의 반목은 커졌을 것이며 결국 가나안 종교는 부정한 것으로 낙인찍히게 된다.

/교수·강남대 구약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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