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아내와 드라마 한 편을 빼놓지 않고 보고 있다. ‘낭만닥터 김사부3’. 시골 작은 병원에서 의료인들 사이에서, 의료인과 환자들 사이에서 일어나는 아름다운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한석규가 김사부 역을 하고 있다. 그동안 병원 드라마들이 많이 방영됐지만, 이처럼 감동을 주는 휴먼 드라마는 찾아보기 어려운 것 같다.
2016년에 시작된 시즌1의 시청률은 27.6%나 됐다. 그후 시즌2, 그리고 이번 시즌3도 내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있다. 교회에서 예배할 때, 또는 개인적으로 기도할 때 눈물을 잊은지 오래됐는데, 이 드라마를 보면서 눈에 눈물이 고이는 걸 자주 경험한다. ‘이상한 변호사 우영우’나 ‘나의 해방 일기’에서도 그랬다.
드라마가 현실을 그대로 보여줄 때 시청자들은 공감을 한다. 나아가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 놓치고 있는 걸 다룰 때에는 더 진한 감동을 받는다. 언제부터인가 드라마는 시사보도보다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교회 부흥회가 한때는 그랬는데….
‘김사부…’의 주제는 사람 살리기다.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일을 위해 현실적인 일, 소중해 보이는 일들을 뒤로 미루는 삶을 생생히 보여준다. 필자가 아는 어느 목회자는 이 드라마를 보며 목회자인 자신을 늘 되돌아보게 된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교인들에게도 이 드라마를 꼭 보라고 권한다고 한다. ‘은혜스러운 드라마’라며….
청년시절 JCI라는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다. 모임을 시작할 때마다 신조라는 걸 외쳤는데 그 한 구절이 지금까지도 내 머릿속에서 남아 있다. “나는 이 지구상의 가장 위대한 보배가 인간의 개성 속에 있으며, 인류에의 봉사가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사업임을 믿는다”라는 구절이다. 맞다! 다른 사람을 향한 봉사가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일이다. ‘히말라야의 슈바이처’로 불리는 강원희 선교사께서 별세하셨다고 한다. 1982년 ‘내 인생의 가운데 토막을 주님께 드리자!“며 네팔로 가서 40년 간 의료봉사를 하신 분이다. 그야말로 인생의 가장 소중한 시기를 주님의 당부대로 인류를 위해 헌신하셨다. 피가 모자라는 수술환자를 위해 자신의 피를 뽑아줄 정도로 사랑을 실천한 분이다.
가끔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역엘 가본다. 서울에서는 전철 표 한 장이면 쉽게 가볼 수 있는 성지다. 어느 교회에서는 새로 임직하는 이들에게 양화진 선교사 묘역으로 ’성지순례‘를 보낸다. 한 분 한 분의 일대기를 읽어보면 그저 머리가 숙여지고 고마운 마음뿐이다. 당시 들어보지도 못한 미개한 이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며 우리에게 사랑을 베풀다가 병에 걸려 치료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선교사와 그 가족들…. 그들이 당시 불과 20대, 30대였다는 사실이 놀랍다. 이스라엘 성지만 가지 말고 꼭 이곳에 들러보길 바란다.
“하루에 열 번 감사하고,
하루에 열 번 베풀자!”
사람은 혼자 살아갈 수 없도록 창조되었다. 다른 사람과 도움을 주고 받으며 살아가는 게 창조주의 뜻이다. 그래야 보다 풍성한 삶을 이루며 누릴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도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give),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으며(take) 살아간다. 도움을 받는 기쁨은 크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았을 때 우리는 ’받는 기쁨‘을 경험한다. 신앙생활도 그런 것 같다. 하나님의 은혜, 이웃들의 도움을 받으며 우리는 행복을 느낀다.
그걸 잘 깨닫고 기억하고 표현하고 갚자는 것이 ’감사행전(感謝行傳)‘의 정신이다. 그러나 거기에 그쳐서는 안 된다. 더 나아가 누군가에게 베풀어야 더 행복한 삶을 이루고 누릴 수 있다. 주님께서는 ’주는 것이 복이 있다”(행 20:35)고 하셨다. 그리스도인은 ’받는 기쁨‘과 함께 ’주는 기쁨‘도 누려야 한다. 내가 받은 은혜와 기쁨을 다른 사람에게 베푸는 것이 ’감사행전‘의 정신이다. 그래서 “하루에 열 번 감사하고, 하루에 열 번 베풀자!”고 외치고 있다.
슈바이처나 강원희 선교사나,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고 이 땅에서 순교한 외국인 선교사들은 모두 ‘받는 사람(taker)’을 넘어 ‘주는 사람(giver)’으로 살아간 ‘작은 예수’들이다. ’받는 기쁨‘을 넘어 ’주는 기쁨’도 누리며 살아간 행복한 분들이다. “과연 나는 테이커인가, 기버인가? 아니면 도움을 받지도 주지도 않고 살아가려는 매처(matcher)인가?”를 생각해보게 된다.
‘받는 기쁨’도 제대로 누리지 못하면서, ‘주는 기쁨’을 누리는 척하며 살려니 너무 힘들지 않은가.
아름다운 동행 감사학교 교장, 전 국민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