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성 - ‘추석, 첫 곡식이 나오는 풍성함의 때’
김경호목사/강남향린교회
대부분 한국교회에서 지키는 11월 셋째주일의 추수감사절은 다분히 미국적이고 우리의 문화전통과는 전혀 상관없는 문화 사대주의적 발상의 연장이다. 우선 자연의 리듬으로도 맞지 않다. 11월 말의 한국의 들판은 모든 추수가 끝나버린 황량한 겨울 벌판인데 무슨 추수감사란 말인가? 감사의 제물이라는 것은 동서고금은 물론 성서에서도 첫번째 곡식 또는 맏배의 짐승으로 드리는 것이다. 제일 처음의 것으로 드리는 것이 정성스런 예물이지 자기들 먹을 것 다 챙기고 쌓을 것 다 쌓고 제사를 드리고 감사를 드린다는 것은 성서적으로도 맞지 않다.
11월 말의 추수감사절은 청교도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건너가 기근과 질병 속에서 그들의 정착에 시금석이 될 첫번째 곡식을 거둔 감격을 기념하는 것이다. 다분히 미국적인 역사다. 우리의 추수감사절로 하기에는 너무 그들만의 역사적 경험이다. 그들은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하고 대륙에서의 첫번째 추수라고 하나 이미 그 땅에는 수 만년 터 잡고 살아온 원주민인, 인디언들의 문명이 있었고 그 땅에서 많은 추수가 이어져왔었다.
그런데 그것 모두를 야만의 역사로 치부하거나 아예 사람이 아닌 짐승으로 생각했는지 아무도 없는 신대륙을 발견했다고 ‘컬럼버스 데이’를 지키고 감사하는 하는 것 역시 너무 ‘서구적’이고, 너무 ‘미국적’이다. 이런 말도 되지 않는 안하무인의 오만한 역사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서도 우리들의 추수감사절은 메이플라워호의 감사절과 분리돼야 한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해 준 선교사들은 우리의 문화를 이해하지 못한 채 우리의 전통과 문화는 저급한 것, 미신적이고 미개한 것이라는 편견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자기 모멸적인 문화 열등 의식을 기독교와 더불어 우리에게 전해주었다. 그래서 기독교는 우리 문화와 전통의 입장에서 보면 이단아요, 자기를 낳은 토양에 대들고 반항하는 반항아이다.
기독교가 전래된 지 2백 년이 지나도 여전히 서양식 건물, 뜻도 모를 문자들이 새겨 있는 서양식 집기, 선교사들이 전해 준 예배, 그 예배에 쓰이는 노래, 악기는 물론 심지어는 선포되는 정신까지도 다분히 서양식이다. 이러한 선교사들의 문화적 식민주의의 의식이 아직까지도 한국 교회의 예배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이 우리가 시급히 고쳐야 할 병이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의 추수감사절은 고유의 절기인 추석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추석은 가을에 첫 곡식이 나오는 때이다. 풍요로운 절기를 맞으며 하나님께 감사함으로 시작하는 것이 마땅하다.
저마다 추석이 되면 고향을 방문한다. 민족의 대 이동이 생기는데 농촌 지역은 고향을 떠났던 식구들이 다 돌아오는 추석절기에 맞추어 추수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합리적이다. 그러나 도시에서는 교우들이 다 귀향한 썰렁한 절기에 축제를 할 수는 없는 일이다. 그래서 필자가 시무하던 교회는 추석 연휴가 지난 다음 주일에 추수감사절을 지킨다. 고향의 풍성함과 가족의 사랑을 확인하고 그 풍성한 마음으로 감사를 드리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했다. 도시에서 꼭 추석에 맞추어 하는 것은 이미 우리 명절로 오랫동안 몸에 배어온 풍습을 일시에 바꾸는 것으로 오히려 우리 문화와 적대적 위치에 설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절기로 볼 때도 성령강림절 이후 11월 말의 추수감사절까지는 약 5~6개월의 공백이 생기며 연말 성탄행사와 겹쳐지게 되므로 9~10월에 추석에 맞추어 감사절을 지키는 것이 목회의 리듬이나 절기상 흐름으로도 적합하다.
반대 - ‘한 해 농사 전체에 대한 감사가 바람직’
한경호목사/21세기 농촌선교회장
선교 초기부터 지금까지 한국교회는 추수감사절을 11월 셋째 주일로 지켜오고 있다. 미국 선교사들의 영향이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와 민족문화에 대한 사회적 각성과 한국인 주체의 기독교인 의식이 형성되면서 추수감사절을 민족 명절인 추석 때 지키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경동교회가 그 물꼬를 튼 것으로 기억한다. 이후 도시 교회들 중에 추석 때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교회들이 증가해 왔고 최근에는 11월 셋째 주일에 묶이지 않고 지키는 교회들이 늘어나고 있다. 이 현상은 일단 더 이상 남의 나라 추수감사절을 우리 것으로 지키지 않겠다는 민족 주체적인 입장의 표현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그러나 고려해야 할 점이 있다. 첫째, 정작 그렇게 해야 할 농촌 교회들은 원래의 11월 셋째 주일을 추수감사주일로 거의 다 지키고 있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추석은 햇곡식이 나오는 때이지, 모든 농산물을 거두고 추수에 대한 감사를 하려면 우리나라의 농사 형편상 11월 중순이 맞기 때문이다. 만생종 벼를 베고 가장 늦게 거두는 콩을 타작하고 나면 거의 11월 초·중순이 되는 것이다. 따라서 추석 때 추수감사절을 지키면 감사예물로 드릴 농산물이 햇곡식 이외에는 별로 없게 된다.
둘째, 추석 때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려면 농촌 교회의 경우는 햇곡식을 거둔 것에 대한 감사이기 때문에 예배의 내용과 양식을 거기에 맞추어서 해야 한다. 농산물을 다 거둔 후의 감사예배와 햇곡식을 거둔 후의 감사예배는 그 내용에 있어서 다를 수밖에 없다. 도시 교회의 경우는 농사와 직접적인 관계가 없기 때문에 물론 별 관계가 없을 것이다. 문제의 본질은 시기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필자도 농촌 목회를 하기 전, 도시에 살 때는 추석 때를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것이 옳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농촌목회를 하면서 그것이 맞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한 해 농사 전체에 대하여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는 소산물을 다 거두고 난 후에 하는 것이 맞지 않은가?
문제의 본질은 분명한 신학적 입장과 예배의 양식과 내용이다. 시기만 추석 때로 옮기고 예배나 프로그램은 과거와 별다르지 않다면 큰 의미가 없지 않은가? 옮겼으면 전통을 살려서 예배에 반영하고 새롭게 해석도 하여 창조적인 절기로 만들어야 의미가 있을 것이다. 형식은 내용이 뒷받침될 때에야 비로소 완성된다. 민족 전통은 오늘도 우리에게 여전히 유효하며 유의미하다. 따라서 민족의 절기를 교회 안으로 수용하여 ‘복음과 한국’을 만나게 하는 일은 매우 중요한 일임에 틀림없다. 나아가 자연적인 절기뿐만 아니라 민족사적인 큰 사건들을 신학적으로 해석하여 교회가 지키고 기념하며 신앙으로 고백하는 일도 매우 중요하다. 전통과 역사 속에서 조상들의 뜻과 숨결과 정서를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통과 역사를 제대로 맛보고 알고 되살리려면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지 않으면 안 된다. 목회자가 먼저 나서야 한다. 노력도 안하고 이름과 형식에서만 전통으로 돌아가면 오히려 전통을 죽이고 박제화(剝製化) 하는 일이 된다.
목회자는 무릇 복음과 민족에 대한 올바른 신학적 이해를 위해 공부해야 할 것이요 그것을 교회 내에서 평소에 가르치고 프로그램화하여 교인들 스스로 내면화하고 자기 것으로 소화할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갖도록 해야 한다. 이런 과정을 거치지 않고 형식만 강조하는 것은 형식적인 당위에 의지하여 자신의 권위를 지키려는 감성적인 접근에 불과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