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붙들 사명,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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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까지 붙들 사명,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
  • 이인창 기자
  • 승인 2023.03.02 10: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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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쓰는 사명선언문] 세계로부천교회 최선 목사 // 부천중앙노회장

예수님 만나 어려운 환경 딛고, 목회소명 순종
“말씀과 성령이 이끄시는 거룩한 공동체 향해”

710m 높이의 충주 가섭산 중턱에는 상촌(桑村)이라는 마을이 있다. 이름 그대로 뽕나무가 많던 마을은 누에고치를 키워 양잠을 주로 하는 고장이었다. 최선 목사는 이 깊은 산골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초등학교 4학년, 마을에서 유일하게 교회를 다녔던 친구 신장호는 그에게 처음으로 예수님에 대해 들려주었다.

친구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던 소년 최선의 신앙은 일찍부터 결기가 있었다. 일손이 부족한데도 교회에 나간다고 혼날 때면, 주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해야 할 몫의 일을 끝내놓았다. 그래도 붙들려 못 가게 할까 싶어 부모님 몰래 돌담을 넘어 뽕나무밭을 지나 교회를 향하던 기억이 지금도 선명하다. 족히 5~6km는 걸어야 했던 거리, 1시간 반 이상 걸어야 했지만 주일을 거른 적이 거의 없다. 하나님은 그렇게 어린 소년을 만나주셨고, 목회자의 소명을 주셨다.

예수님 만난 어느 산골 소년
“조선시대 봉화대가 있을 정도로 외진 산골이었어요. 가섭산에는 사찰들도 꽤 여러 개 있어서 불교 영향도 강했습니다. 어머니도 절에 다니셨고 정화수를 떠서 비는 토속신앙도 믿었으니 당연히 제가 교회에 가는 걸 싫어하셨지요.”

부모님은 반대했지만 최선 목사(세계로부천교회)는 어릴 때부터 교회 가는 것이 그렇게 좋았다. 처음 교회에 갔을 때가 여름성경학교 즈음이다. 변변찮은 놀이문화가 없을 때 교회는 노래와 즐거운 놀이가 넘쳐나는 신세계 같았다.

학년이 높아질수록 부모님의 반대는 강해졌다. 부모님은 1남 4녀 외아들이 혹시나 잘못되려나 싶어 기존 신앙을 포기하지 못했다. 핍박이 강해질수록 믿음은 더욱 커져만 갔다.

충주지역 중고등학교 동계연합수련회에 참석했을 때 성령체험을 하고 방언의 은사까지 받으면서, 목회자에 대한 소명은 확고해졌다. 믿음이 깊어질수록 부모님을 구원해야 한다는 열망은 더욱 커졌다. 최 목사는 또래 친구들과 전도특공대까지 꾸려 마을마다 순회하며 복음을 전할 정도로 열심이었다.

좀처럼 예수를 믿기 어려울 것 같았던 아버지는 예상보다 일찍 믿음을 갖게 됐다. 최선 목사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아버지는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심장판막 수술을 받게 됐고, 수술 전 아들의 전도를 받아들였다. 아버지는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고, 수술 이후 일 년을 지내다 천국으로 향했다.

세계로부천교회 최선 목사는 이해할 수 없는 고난의 시기를 이겨내고 목회자로 부르심에 순종했다. 항상 깨어있는 교회와 목회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목회자로 부르시는 연단의 시간
아버지가 돌아가시면서 가세는 급격히 기울었다. 모두가 어려웠던 시절이지만 가장이 없는 집안은 더 곤궁했다. 대학진학을 앞두고 고민이 커졌다. 어릴 적부터 학교에서는 공부를 꽤 하는 아이였고, 학생회 임원을 할 정도로 리더십도 뛰어났다. 목회자가 되겠다는 서원은 이때만큼은 잊고 있었다. 일단은 대학을 가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결국 학비와 생활비 걱정이 없는 사관학교에 지원하기로 했다. 고등학교 내신성적도 1등급일 정도로 아주 좋았고, 합격할 자신도 있었다.

“그런데 2차에서 떨어진 겁니다. 아주 크게 낙심했습니다. 아버지가 남겨둔 농사를 지어야 하나 고민을 했지만 언젠가는 대학에 가겠다는 목표로 상경을 결심했습니다. 가정경제가 모두 멈추었기 때문에 공장을 다니며 일을 해야 했습니다.”

1980년대 중반, 상경 후 처음 정착한 곳이 봉천11동 반지하였다. 연탄가스 중독으로 3번이나 실려 가 사경을 헤맬 때도 있었다. 최 목사를 전도했던 친구 신장호가 연세대를 다니고 있다는 소식은 한편으로 그를 좌절케 했다.

“일터로 가야 하는 저를 보고 ‘나는 안되는 사람인가보다’ 낙담을 많이 했습니다. 막내가 초등학생인데 가족들과 서울살이를 해야 하니 대학진학은 더 멀어진 셈이었죠. 15번이나 이사하며 반지하를 전전했습니다.”

다행히 최선 목사는 늘 교회 곁에 있었다. 봉천11동 지하방에서 살 때 나갔던 교회가 증경총회장 최낙중 목사가 담임했던 관악교회(현 해오름교회)였다. 교회를 다니며, 최선 목사는 학생회 교사와 성가대 지휘를 하면서 신앙을 키워갔다.

“돌이켜보면 목회자로 부르기 위한 연단의 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고난의 시기에는 하나님의 뜻을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중에야 깨닫게 됐죠.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9년이 지나서 마침내 대학에 진학할 수 있었습니다.”

최선 목사는 대학 학부를 졸업하고 신학대학원에서 공부하면서 부교역자로 시무했다. 대학교 교수님과 목사님의 소개로 좋은 자매를 만나 결혼까지 했다. 25년 부교역자 사역은 순종을 배운 훈련의 때로 기억한다. 그리고 11년 전 세계로부천교회 청빙이 왔고, 그는 주님의 부르심을 따라 걸어왔다.

세계로부천교회 전경

“항상 깨어있는 교회가 될 것”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은 최선 목사가 교인들과 함께 이루어가고 있는 세계로부천교회의 사역 방향이다.

‘하나님 사랑’은 복음을 끝까지 전파하겠다는 각오를 담고 있다. 그 일환으로 ‘300만부흥운동본부’를 운영하고 있다. 수치적인 목표보다 예배와 집회, 방송과 신문 기고 등 다양한 방법을 활용해 최대한 복음을 전하겠다는 각오로 달려가고 있다.

특별히 교회는 삼일절, 현충일, 6.25, 제헌절, 광복절에는 주일예배 전 애국가를 부르고 있다. 최 목사는 “하나님께서 우리나라에 복음이 들어오게 하시고, 자유대한민국을 주신 은혜에 감사하는 뜻에서 애국가를 부른다”면서 “‘나라 사랑’을 항상 교인들에게 강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이웃 사랑’은 박신환 원로목사가 개척교회 시절부터 세계로부천교회가 걸어온 섬김 사역이다. 지금은 중동신도시와 잇대어 있을 정도로 한복판이지만 1974년 교회가 개척될 당시만 해도 ‘새마을동네’라 불리는 철거민촌이었다. 이웃을 돌보는 사역이 변함없었다.

현재도 교회 앞에는 ‘빨간희망우체통’이 하나 세워져 있다. 지역주민 누구나 우체통에 편지를 보내면, 교회는 주민센터와 연계해 방법을 찾아 어려운 주민들을 지원해주곤 한다. 작년부터 ‘부천사랑가정학교’라는 이름의 잡지를 발행해 지역 내 관공서와 학교, 가정에 무상으로 나눠주고 있다. NGO 월드쉐어와 사역하면서 교인들이 동참하는 가운데 해외결식아동 돕기를 하고 있다.

세계로부천교회는 주일예배를 시작하며 늘 ‘오직 예수’, ‘오직 복음’, ‘오직 교회’, ‘오직 천국’를 외친다. 주보에 기록된 ‘사명선언문’, ‘십계명’, ‘가족을 위한 기도문’, ‘고백의 기도문’도 성도들과 함께 낭독한다. ‘말씀과 성령이 이끄시는 거룩한 공동체’라는 세계로부천교회의 비전을 다짐하는 시간이다.

“‘하나님 사랑’, ‘나라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기둥을 세우려면 항상 깨어있어야 합니다. 목회는 저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잖아요? 먼저 하나님의 은혜가 있어야 하고 우리 성도들의 동역이 있어야 합니다. 항상 깨어있는 교회를 세우는 사명이 저와 우리 교회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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