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처 없이 고향 떠나온 이웃들의 기댈 언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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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처 없이 고향 떠나온 이웃들의 기댈 언덕
  • 이인창·김수연 기자
  • 승인 2023.01.11 14: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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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은 예수의 손을 잡다③ 전쟁으로 고통받는 우크라이나 피란민
광주 고려인마을의 갓플리징교회와 이주민지원종합센터는 우크라이나 피란민의 손을 꼭 잡아주고 있다.

수천, 수백억을 들인 예배당이 랜드마크처럼 위풍당당히 서있다. 연합예배라는 이름으로 모인 수백명의 찬양대는 유수의 합창단 부럽지 않은 웅장한 소리를 뽐낸다. 5천만의 인구 중 기독교인이 천만에 육박한다고 자랑하는 우리나라다. 그러나 우리는 냉정히 성찰해보아야 한다. 뾰족한 첨탑과 수많은 군중, 번듯한 옷들과 재물 사이에서 우리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 예수는 어디 계시는가.

예수는 그곳에 계시지 않았다. 화려한 왕궁에서 귀족들과 어울리지도, 개선 깃발을 휘날리는 군대의 선봉에 계시지도 않았다. 오히려 가난한 군중들의 일상 속 거리에서, 먹을 것조차 변변치 않은 들녘에서 세리와 죄인의 친구가 되셨다.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않고 종의 형상을 자처하신 그분은 언제나 가장 환영받지 못하는 곳에 계셨다.

그분은 오늘날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너희 형제 중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고. 과연 이 시대 교회의 시선은 ‘지극히 작은 자’에게 향해 있는가. 어쩌면 화려함에 눈이 멀어 우리 곁에 있는 ‘작은 예수’를 놓치고 있는 것은 아닐까. 2023년을 시작하며 ‘작은 예수’의 손을 잡는 현장을 찾아봤다.<편집자주>

든든한 버팀목 교회 
한국말을 거의 하지 못하는 올해 65세 문클라브리아 할머니는 작년 3월 우크라이나 니콜라유에서 광주 고려인마을에 들어왔다. 전쟁을 피해 잠시 머물다 보면 곧 우크라이나로 돌아갈 수 있을 줄 알았다. 다행히 남편과 딸이 한국에 함께 있기 때문에 가족들을 두고 온 다른 우크라이나 사람들보다 걱정은 덜 하지만, 향수병까지 걸릴 정도로 고국을 그리워하며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더 큰 문제는 건강이다. 고혈압, 골다공증, 여성질환 외에도 갖가지 질병으로 생활 자체가 고통스럽다. 병원을 가야 하는데 의료보험까지 없어 난감하기도 부지기수. 애초 부자도 아니거니와 갑자기 전쟁을 피난을 온 통에 수중에 있는 돈이라곤 없다.

누구도 의지할 수 없을 위기의 순간, 할머니의 손을 잡아준 이가 바로 광주 고려인마을에서 이주민지원종합센터를 이끌고 있는 전득안 목사(갓플리징교회)였다. 

전 목사는 아프다는 전화가 오면 곧장 차를 끌고 문 할머니를 찾곤 한다. 다행스럽게도 이주민지원종합센터를 돕고 있는 광주기독병원(원장:최용수)과 사랑샘병원(원장:사강석), 러비미치과(원장:지의신·윤형철)에서 적절한 치료를 받을 수 있었다. 지금은 체류한 지 6개월이 지나 의무적으로 의료보험에 가입하고 있지만, 이번에는 돈을 벌지 못해 보험료 납부가 부담스러운 처지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때 전득안 목사와 이주민지원센터는 항상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황아르촘 씨(35) 역시 문 할머니와 비슷한 시기 이 땅에 입국했다. 이제는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격전지 마리우폴 출신이다. 아내와 두 자녀를 데리고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던 것이 감사할 따름이다. 마리우폴은 러시아군 점령지인 데다 주민 4명 중 1명이 사라질 정도로 위험한 도시였다. 조금만 늦었다면 가족 역시 생사를 장담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황 씨 부부는 젊은 세대답게 빠르게 한국 생활에 적응해가고 있다. 갓플리징교회에는 이주민종합지원센터가 운영하는 공부방이 있다. 같은 언어를 쓰는 고려인 친구들이 많아 자녀들이 어울리기도 쉽고, 초등학교에 보내는 것도 만족스러운 편이다. 

물론 생활 속에서 자주 장애물을 만나게 되고, 전득안 목사와 김현 사모는 최고의 조력자가 되어주고 있다. 

황 씨는 “우리 같은 피란민들은 안정적인 일자리가 필요하다. 그러나 한국어를 잘 모르기 때문에 쉽지 않다. 집세도 비싸고 의사소통도 어려워서 생활이 힘들기 때문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우크라이나 사람도 많다”고 이야기했다. 

화장실도 가지 않은 할머니
광주 고려인마을에 머물고 있는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은 작년 겨울 뜻밖의 선물을 한가지 받았다. 12월말 이주민종합지원센터가 지칠 대로 지친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을 위해 좋은 사고를 하나 친 것. 바로 ‘우크라이나 피난 고려인 동포와 후원자를 위한 송년의 밤’이다. 

후원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넉넉지 않은 살림이지만, 이주민지원센터는 220명이나 되는 우크라이나 피란민과 고려인 동포를 모시고 최고급 컨벤션센터를 빌려 성대한 잔치를 벌였다. 

우리에게 익숙한 송년 행사지만, 이국땅에서 버텨야 하는 전쟁 피란민들에게 엄청난 환대와 위로의 자리가 됐다. 

갑작스럽게 판이 커졌지만, 이주민센터는 수준 높은 성악가와 연주자들을 모시고자 애썼다. 고국에서 맛보았던 음식도 일부러 식당에 요청해 준비했다. 외부 초청 인사들의 순서도 빼고,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이 주인공이 될 수 있도록 집중했다. 피란민들에게 용기를 주는 희망의 메시지가 됐으면 족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피란민들은 전득안 목사와 김현 사모, 봉사자들의 손을 붙잡고 눈물을 흘리며 고마워했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감사하는 마음은 충분히 전해졌다. 어떤 피란민 할머니는 한 순서도 놓치지 않으려고 화장실도 가지 않았다며 눈가가 촉촉해졌다. 

전득안 목사는 “피란민 중에는 교회에 다니지 않는 분들이 있었기 때문에 우리 교회 이름을 내걸지 않았다. 선입견 때문에 순수하게 돕고 싶은 의도가 왜곡될 수 있고, 부담 갖고 오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라며 “지속적으로 교회가 섬기다 보면 자연스럽게 이분들도 알게 될 것”이라며 들려주었다.

조건 없는 사랑에 감동한 소녀 
“우크라이나에서 살 때 저희 삼촌이 ‘하나님은 없다’며 교회에 가지 말라고 했었어요. 그렇지만 한국에 온 지금 제게 교회는 몸도 마음도 평안을 누릴 수 있는 유일한 안식처가 됐습니다. 이제는 매주 교회에 나가 밥도 먹고 예배하는 시간이 제일 좋아요.” 

안산에 위치한 온누리M센터의 도움으로 작년 6월 어렵사리 한국 땅을 밟은 아냐(Anya·12세) 양의 고백이다. 그가 우즈베키스탄 출신의 고려인 엄마와 네 살 터울의 오빠 손을 잡고 한국에 온 이유는 말 그대로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서였다.  

포탄이 터지는 소리와 함께 총성으로 얼룩진 고향을 뒤로 하고, 아냐 가족은 필요한 서류와 약간의 돈만 급히 챙겨 나와 폴란드에 잠시 몸을 피했다. 그곳에서 한국인 선교사의 도움으로 온누리M센터와 연이 닿은 덕분에 또 한번 무사히 한국까지 올 수 있었다. 이후 온누리M센터는 국내 난민들을 돕는 사역단체들을 소개해주며 아냐 가정이 한국에 정착할 수 있는 길을 터줬다. 

온누리M센터는 지역 다문화가정 자녀들을 위한 공부방을 통해 아냐 양에게 한글도 가르쳤다. 사실 말도 통하지 않는 이역만리에서 아냐 양이 하루아침에 한국생활에 적응하기란 여간 쉬운 일은 아니었다. 아냐 양은 “초반 가장 힘들었던 점은 ‘언어’였다”며 “한국말을 전혀 몰라서 마트에서 간단한 식료품 하나 사는 것도 손짓 발짓 다 써가며 쩔쩔 맸다”고 설명했다. 

이런 아냐 양에게 그야말로 ‘피할 길’이 돼준 온누리M센터는 아냐 양이 데려온 친구들에도 모두 장학금을 주어 이들이 ‘꿈’을 포기하지 않도록 물심양면 지원을 펼쳤다. 
현재 중학교에 다니는 아냐 양은 “만약 온누리M센터에서 한글을 배우지 못했다면 학교 수업을 전혀 따라가지 못했을 것”이라며 “이곳에서 교육도 받고 친구들도 사귈 수 있어서 감사했다”고 했다. 

무엇보다 아냐 양은 온누리M센터에서 러시아어 예배에 출석하면서 신앙을 키워갔다. 동시에 한국사회 어디에서도 받기 힘들었던 ‘환대’를 경험하면서 예수님의 사랑을 누리기 시작했다. 

한때 그는 전쟁의 참상을 목격하고 공포와 두려움에 사로잡혔던 적도 있었지만 지금은 조건 없는 사랑을 베풀어주는 성도들 덕분에 심신의 안정을 찾았다. 

그는 “나를 가족처럼 대해준 교회 식구들에게 늘 고맙다. 먹을 것도 떼어주고 따뜻한 웃음과 관심을 보여준 교회 사람들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조금씩 알아가고 있다”며 “그들 덕분에 교회가, 그리고 한국이란 나라가 참 따뜻한 곳이라고 느끼고 있다”고 전했다. 

아냐 양(맨 오른쪽)이 안산 온누리M센터에서 찬양을 부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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