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살린 음악이 이제는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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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살린 음악이 이제는 세상을 밝히고 있습니다”
  • 손동준 기자
  • 승인 2022.11.28 17:1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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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삶 – ‘휠체어 탄 음악가’ 장은도 목사

어린 시절 병원 생활 하며 접한 음악이 인생을 바꿔
플룻 전공…장애 극복하고 ‘레슨’ 전문가로 승승장구
고등학생 시절 하나님 만난 후 뒤늦게 목사 안수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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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은도 목사.

새우와 가재, 게 등 갑각류 동물에게는 뼈가 없다. 전신을 둘러싸는 단단한 외골격이 있을 뿐이다. 외골격은 몸을 움직이게 할 뿐 아니라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몸을 보호한다. 문제는 단단한 외골격 때문에 몸이 성장하기가 여간 까다롭지 않다는 것. 그래서 갑각류는 허물을 벗는다. 손톱이 떨어지듯 딱딱한 껍데기가 몸에서 떨어져 나가는 아픈 과정이다. 익숙하고 단단한 것이 떨어져 나간 자리엔 바람만 닿아도 쓰라린 생살이 세상에 얼굴을 내민다. 새로운 외골격이 단단해질 때까지 갑각류는 외부 공격으로부터 한없이 취약해진다. 최대한 몸을 낮추고 때를 기다려야 한다. 그때야 비로소 성장의 달콤한 열매를 얻을 수 있다.

이런 성장 원리는 인간과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위대한 성장 스토리 뒤에는 반드시 아픔과 고독, 괴로움이 있기 마련이다. 중증 소아마비를 이기고 정상급 플루트 연주자이자 수십 명 관현악단을 이끄는 지휘자가 된 장은도 목사(57세, 신나는교회 협동)의 간증을 듣는 데, 마치 갑각류의 허물 벗기와도 같은 인생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다. 하나님은 그에게 장애라는 가시를 주셨지만, 그는 아픔을 딛고 우뚝 섰다. 오죽하면 플루트 연주자들 사이에서 “고장 나고 망가진 자세를 고치려면 장은도에게 가라”고 할 정도의 말이 나왔겠는가. 음악의 고장 비엔나에서 유학하던 시절에는 남들은 10년 걸려도 마치기 어려운 과정을 6년 만에 끝마친 그다. 단순한 몇 마디로 정리하기에는 그가 지나온 시절이 그리 단순하지 않다.

 

지독한 외로움이 음악을 만나다

“그 시절에 음악을 하고, 유학까지 다녀오신 걸 보면 집안이 부유하셨나 봐요?”

기자의 물음에 장은도 목사는 미묘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아버지가 30년간 바람을 피우셨어요. 당시 집안 사정은 말이 아니었죠. 불우한 환경에서 장애가 있는 아이가 태어난 겁니다. 다행히도 국가에서 영세민에게 의료비 혜택을 줬어요. 지금 돈으로 수천만 원씩 들었을 병원비가 한 달에 몇만 원이면 해결이 됐죠. 열 살도 안 된 어린 시절부터 가족과 떨어져서 9년간 재활병원에 살았습니다. 가족과의 면회 시간은 일주일에 1번씩 주어졌는데, 우리 부모님은 가난해서 그마저도 잘 오지 못하셨어요. 한 달에 한 번 엄마가 면회를 오셨죠. 어린 나이에 지독하게 외로웠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바로 그때 음악이 그를 살렸다. 당시는 피아노 구경하기도 어려웠던 시절이다. 병원 강당에는 그 귀한 피아노가 한 대 있었다. 병원에서는 음악 교실을 열어 아이들을 가르쳤고, 어린 은도는 합창뿐 아니라 여러 악기를 병원에서 두루 섭렵했다. 장 목사는 “지독하게 외로운 인생에 한 줄기 빛처럼 찾아온 음악이어서인지 습득이 빨랐다”고 회상했다. 자신의 할아버지가 구한말 이름을 알린 피리꾼이었다는 사실은 훗날에야 알았다. 플루트는 그때 배운 악기 가운데 하나였다.

“플루트를 불면 소화가 잘 됐어요. 지금도 제가 명치 아래까지 코르셋을 입고, 다리에는 보장구를 차고 있거든요. 허리가 80% 정도 휘어있어서 앉아만 있어도 명치가 계속 압박되면서 숨이 가빠지곤 합니다. 그런데 하복부에 힘을 모아서 플루트를 불면 심장이 좋아질 뿐 아니라 소화도 잘되고, 혈압도 낮아지고, 모든 것이 안정되는 거예요. 저는 운동 삼아 플루트를 붑니다. 하나님께서 제 건강을 위해 플루트를 주셨다고 믿어요.”

대학에서 전공할 때도 남들이 하루 4~5시간씩 5년이면 끝낼 수 있는 분량을 자신은 7시간씩 10년은 한다는 각오로 연습했다. 자세가 중요한 악기인데 몸이 불편하다 보니 좋은 자세, 좋은 소리를 만들기 위한 부단한 연구가 필요했다. 그런 노력을 플루트는 배신하지 않고, 깨끗하고 아름다운 소리로 보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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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목사는 플루트를 전공했지만, 관현악단 지휘자로도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다.

 

모든 것이 은혜, 은혜였소

이런 남다른 노력 덕분이었을까. 장 목사는 이미 학생 시절부터 전공생 레슨으로 전국적으로 이름을 알렸다. 사당동에 차린 학원은 그야말로 ‘대박’을 쳤다. 당시 대학원 은사는 장 목사에게 비엔나 유학을 권유했다. 유학을 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먹고 살 걱정은 없던 그였지만, 본고장에서 기초부터 다시 배우고 오고 싶다는 음악가로서의 열망이 그를 움직였다. 마침 학원에서 월 천만 원씩 수입이 들어오던 터라 아내에게 경영을 맡기고 과감히 유학길에 올랐다.

비엔나에서는 현지인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당시 학교 학장은 자신의 방을 레슨실로 내어줬다. 연습실이 4층에 있었기 때문에 장 목사가 매번 올라가기엔 어려움이 컸기 때문이다. 은사의 친구들인 빈 국립대의 의사들은 학기마다 공항 픽업을 나와줬고, 시시때때로 그를 업어주고 가방을 들어줬다.

“한 사람을 키우려면 마을 전체가 필요하다는 인디언 속담처럼 저 하나를 키우기 위해 많은 사람이 동원됐습니다. 물론 한국에 있던 아내의 도움도 컸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모든 것이 은혜였습니다.”

배려는 컸지만, 원칙에는 차별이 없었다. 상냥하게 대하는 것과 음악에 대해 철저한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었다. 곡을 연주하다가 지치면 쉬는 시간을 충분히 줬지만, 소리에 대해선 정확한 기준을 지키는 유럽 사람들이었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비엔나의 아름다운 풍경을 감상할 겨를도 없었다.

“6년을 살았지만, 저는 비엔나하면 딱 한 마디 ‘외롭다’는 말만 떠오릅니다. 나중에 아내와 두 딸을 데리고 갔었는데 그제야 비엔나가 예뻐 보이더라고요.”

유학을 마치고 돌아와 각종 대학과 예술고등학교에 출강했다. 입시생 레슨도 계속했다. 탄탄대로였다. 돈도 잘 벌렸고, 재산도 늘어났다. 그런데 삶은 조금씩 조금씩 무분별해졌다.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벗어나지 말아야 할 궤도가 있음에도, ‘사회생활’이라는 명목 아래 선을 넘는 일들이 늘어났다. 그런 삶이 계속되자 ‘하나님의 태클’이 강력하게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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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 목사와 단원들.

 

다시 하나님 앞에

장 목사는 모태 신앙인은 아니다. 어린 시절 부모님 손을 잡고 교회에 나가긴 했지만, 부모님의 신앙생활이 시들해지면서 자연히 교회와 멀어졌다. 그러다 고등학교에 진학했을 때 두 살 위의 선배가 등하굣길에 그의 가방을 들어주면서 ‘우리 교회에 나오라’로 꼬셨다. 선배를 따라 교회에 나가기 시작했는데, 처음 예배당을 찾은 날 ‘실로암’ 찬양을 듣고 눈물을 쏟았다. 교회를 다니기로 하고 반주자가 됐다. 그해 여름 수련회에서는 강력한 ‘성령 체험’을 했다.

“징그럽게 미웠던 친구가 좋아 보이더라고요. 거기 있던 모두가 함께 기도하고 축복하고 껴안고 사랑한다고 고백을 했습니다. 후에 그 자리에 있던 사람 중에 7명이나 목사가 됐으니 참으로 강력한 성령의 역사가 아니었나 싶어요.”

그랬던 그의 신앙이 ‘승승장구’ 하는 사이에 서서히 과녁에서 멀어진 것이다. 하나님은 강력한 태클로 그를 다시 제 자리로 돌려놓으셨다. 문제가 터진 곳은 부동산 투자였다.

“집에 빨간 압류 딱지가 붙고서야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매달려 기도했습니다. 그렇게 6개월을 기도하는데, ‘내 일을 하라’는 음성이 계속 들렸습니다. ‘이미 하고 있는데요? 간증도 다니고 교회에서 봉사도 하고 있잖습니까’ 했더니 ‘그렇게 말고!’라고 하시더군요. 신학교에 가라는 뜻인가 하여 제가 살던 동탄에서 가까운 평택대학교에 입학했습니다.”

수입이 크게 줄었던 때였다. 그런데 입학하고 보니 감사하게도 교내에 장애인이 그 하나뿐이라, 장애인 관련 장학금 혜택이 온전히 그의 몫으로 돌아갔다. 하나님이 그를 위해 예비하신 것 같았다. 이후 목사가 됐지만, 교단 내에서 일어나는 싸움에 신물을 느껴 그곳을 떠나 2019년 백석 교단에 가입했다. 현재는 신나는교회(담임:이정기 목사)에서 협동 목사로 섬기며 백석 신대원에서 실천신학 박사 과정 마지막 학기를 지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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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석대 신대원에서 실천신학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장은도 목사. 장 목사는 ‘현대 교회음악이 마틴 루터의 만인제사장주의로 돌아가야 하는 이유’를 주제로 박사 논문을 쓰고 있다.

목사가 된 지 어느덧 9년째. 과거 ‘잘 나갈 때’와 비교하면 벌이도 줄어들고 사회적으로 보면 불안한 환경이지만 그는 늘 ‘오히려 감사’를 고백한다. 그동안 장애로 겪은 모멸감과 고생, 서러움이 고통으로 남지 않은 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은혜와 기쁨으로 덮으셨기 때문이다. 병원에서 두드려 맞으며 불침번을 서던 일도, 대학 면접에서 ‘쟤 들어오면 누가 책임질 거야’ 하던 어른들의 말도, ‘너랑 친해지면 악기 들어줘야 하니 힘들다’던 친구의 이야기도 그에게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오히려 장 목사는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광을 위해 장애를 주셨다는 성경 말씀은 거짓이 아니다”라며 “장애가 있는 사람도 약간의 배려만 있으면 훌륭해질 수 있고, 동등하다는 것을 내 삶을 통해 하나님이 증명하셨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크리스천 오케스트라인 ‘DCL(Deos Cristus Logos)오케스트라’를 꾸려 10년째 자선공연을 펼쳐온 것도 장 목사의 이런 신앙 고백을 구체화한 것이다. DCL오케스트라에는 그의 제자들과 주변 음악인들이 참여하고 있다. 자선 음악회를 통해 발달장애인과 소녀가정의 전세보증금 마련, 선교지 악기 지원, 연변의 탈북자 자녀 돕기, 독거노인 난방비 지원, 양로원에 봉고차 지원 등 뜻있는 일들을 해왔다.

오는 12월 7일에도 서울 강남구 일원동 세라믹팔레스홀에서 자선 음악회를 연다. 이번 공연에서도 장 목사는 지휘봉을 잡는다. 국회의원이자 피아니스트로 잘 알려진 김예지 교수(숙명여대)와 성악가 김동현 교수(성결대), 여명효 첼리스트 등이 장 목사와 함께 무대를 꾸민다.

장 목사는 “자선 음악회는 하나님께서 제게 주신 정체성과도 같다”며 “앞으로도 하나님의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 도움이 필요한 일들을 찾아내고 음악으로 세상을 밝게 하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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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는 12월 7일 세라믹 팔레스 홀에서 장 목사가 단장으로 있는 DCL오케스트라의 자선 음악회가 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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