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부활을 만난 많은 사람들 가운데 마리아의 이야기를 본다. 주님의 죽으심에 대한 슬픔에 무덤을 찾아 갔지만 주님의 시체는 없어지고 빈 무덤만 있다. 걱정과 함께 절망감을 견딜 수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울고만 있다. 그 때 주님의 음성이 들린다.
‘마리아야 어찌하여 우느냐?’
그 한마디에 마리아의 모든 슬픔이 사라진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다. 죽음 때문에 슬펐는데 그 죽음이 없어졌기에 거기에는 슬퍼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빈 무덤이 더 큰 은혜의 현장이 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그 상황을 겪고 있다. 당연히 계셔야 할 주님이 보이질 않는 것처럼 우리의 삶에 당연히 있어야 할 것들이 사라질 때 우리는 얼마나 큰 슬픔이 있나? 돈, 사람, 건강, 일… 모든 것이 텅 비어 간다는 현실에 남모르게 울고 있는 상황이 많다.
나오미가 그랬다. 모압 땅으로 갔다가 남편과 두 아들을 잃어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온다. 그 때 나오미는 이렇게 말한다. “나오미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를 나오미라 부르지 말고 나를 마라라 부르라 이는 전능자가 나를 심히 괴롭게 하셨음이니라 21 내가 풍족하게 나갔더니 여호와께서 내게 비어 돌아오게 하셨느니라”(룻 1:20)
나오미란 이름이 ‘즐거움’, ‘기쁨’이라는 의미인데 지금 그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다.
속에서 쓴 물이 올라오는 것을 느낀다. 자존심이 무너지고, 보호자도 없고, 먹을 것까지 걱정해야 하는 신세, 남의 집에서 이삭을 줍고 살아야 하는 형편이다. 한마디로 다 끝난 것 같고, 살맛이 안 나고, 우울하고, 죽고 싶을 수도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텅 빈 나오미의 삶에 룻을 통해 보아스를 넣으셔서 다시 풍족하게 하시는 은혜를 주셨다.
나는 무엇이 비어 있나? 어떤 슬픔이 있나? 부활의 주님이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어찌하여 우느냐?” 신실하신 하나님이 우리의 슬픔을 제거하시려고 그 음성을 주시는 것이다. 주님이 안 보인다고 슬퍼하지 마라. 주님은 지금도 살아 계시고 그곳에 계신다. 텅 비어 있다고 슬퍼하지 마라. 부활의 주님이 그 슬픔을 기쁨으로 바꾸실 것이다. 더 이상 슬퍼할 이유가 없는 절대 기쁨이다. 그러기에 오히려 이 빈 현장이 예수님은 살아 계시다는 것을 더 실감나게 하고 텅 비어 보이는 현실을 풍족함으로, 생명으로 채우시는 은혜의 손길을 경험하는 것이다.
다시 그 기쁨을 회복하자. 예수님이 다시 사셨다. 이것 보다 더 큰 위로가 어디에 있나? 부활의 신앙은 그런 것이다. 부활의 주님을 만난 제자들과 초대교회 성도들의 삶이 그랬다. 예수는 메시아라고 외칠 때 박해와 궁핍한 삶에도 기뻐하였고 죽음도 두렵지 않은 사람들이 된 것이다. 어떤 학자가 1세기 교회 문서를 조사하다가 그리스도인들의 명단이 기록되어 있는 문서를 발견하였는데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는 ‘티테디오스(Titedios)’ 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보았다. 이 말은 희랍어 단어 ‘근심하지 않는 사람’ 이란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의 사람들과 구별하고 싶은 그들의 존재를 이렇게 표현하는 것이다. 비록 슬픈 현실, 걱정할 현실이 있지만 부활의 주님 때문에 슬퍼할 이유가 없어짐에 기뻐하는 것이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