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휴~~ 나는 그 성도가 말만 하면 가슴이 답답하다니까요~”
언젠가 지방에서 목회하시는 목사님이 제직회 할 때마다 똑똑한 성도가 나와서 차트를 준비하고 브리핑하는데 반박도 못하고 미치겠다고 하소연하는 말씀이었습니다. 그 성도는 장로님 아들로 대학에서 통계학을 전공하고 집사로 섬기고 있는데, 교회 안에서도 말 잘하는 무지 불편한 성도로 자리 잡고 있었습니다.
“총동원 전도주일을 지키자~!” 이번엔 이렇게 해보자 하면 언제 준비해 왔는지 몇 년치 통계를 내서, 재작년엔 우리 교회가 이랬고 작년엔 이랬고, 우리 교회 부흥 속도가 이렇고, 돈은 얼마 들었고 결과는 이래서 그 비용을 들여 총동원 전도주일을 하는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차트까지 준비하고 정확한 통계를 내고, 너무나 설득력 있게 말하는 그 집사의 논리적인 브리핑에 모여 있는 성도들은 모두가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나요.
“글쎄 그 집사가 하는 말의 결론은 항상 ‘안 된다~!’ 예요. 그 안 된다는 말을 하느라 얼마나 공을 들여 준비하는지 환장하겠다니까요. 교회 건축도 그 성도 브리핑 때문에 몇 번 좌절되고, 그 성도가 그 교회를 나간 후에야 비로소 시작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밤, 베드로는 예수님을 멀찍이 따릅니다. 가까이도 아주 멀리도 아닌 ‘안전지대’의 거리, 그 거리가 주님을 믿노라 하면서도 가까이 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주님을 떠나지도 못한 성도들의 모습이기도 하구요.
그렇게 ‘멀찍이’ 떨어진 성도가 형식적으로 교회에 나오고, 직분도 갖고 있고, 그 교회에 다닌 지 오래되어서 어떤 영향력도 있게 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계산 잘하는 모습을 갖게 됩니다. 할까 말까 갈등하기도 하고, 헌신과 섬김은 오래전 이야기고 지금은 그저 손해 보는 어떤 건 안 하는 약아빠진 신앙의 모습을 갖게 되거든요. 똑같은 베드로인데 성령 충만을 경험한 후 그는 안전지대를 추구하는 성도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들을 위협하여 이후에는 이 이름으로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게 하자 하고 그들을 불러 경고하여 도무지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지도 말고 가르치지도 말라하니 베드로와 요한이 대답하여 이르되 하나님 앞에서 너희의 말을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우리는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 하니 관리들이 백성들 때문에 그들을 어떻게 처벌할지 방법을 찾지 못하고 다시 위협하여 놓아 주었으니 이는 모든 사람이 그 된 일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림이라”(행 4:17~21)
교회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면 계산부터 먼저 되시는지요? 교회에서 어떤 일을 계획하고 진행하면 ‘내가 헌신할 부분이 어떤 부분이지?’ 하는 생각이 먼저이신지요? 은혜롭고 아름다운 신앙의 모습을 끝까지 가지고 초심을 잃지 않는 충성스러운 성도가 되길 기도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