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 위해 전투기 조종 내려놓고 전역 후엔 목회의 길로
성경 속 욥처럼 모든 것 잃었지만…기도 중에 ‘길’ 열려
1973년 입학해 1997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후 남부러울 것 없는 엘리트 군인이었다. 교회 품안에서 자란 그는 나무랄 데 없는 신앙인이었다. 부모님처럼 교회를 열심히 섬겼고, 모두가 부러워하는 인재로 성장했다.
2000년 중령으로 예편하며 군생활을 마친 서성철 목사(공주 새소망우리교회)는 신대원에 진학해 목회자가 되었다. 그런데 욥처럼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잃어버렸다. 온 세상이 자신을 외면하는 것 같았다. 고난의 터널을 지나게 하신 하나님께서는 기적처럼 회복하게 하시고 3년 전부터 새소망우리교회를 담임하며 복음전파의 사명을 감당하게 하셨다. 지금은 공주교도소기독교선교회장까지 맡아 한결같이 교정 선교를 감당하고 있다. 그의 고난과 회복의 역사를 들어봤다.
공군 장교에서 목회자로 부르심
서성철 목사는 사관학교 임관 후 누구나 부러워하는 전투기 조종사로 첫발을 내딛었다. 자부심도 컸지만 고민이 있었다. 비행에 온통 전념해야 하는 조종사는 신앙생활을 하기 여의치 않았던 것. 처우와 진급이 보장됐지만, 조종관을 내려놓고 정훈장교로 보직을 변경했다.
“새벽기도로 매달린 끝에 하나님께서는 정훈장교를 시켜주신 것 아닌가 싶습니다. 목회 역량을 키울 수 있었던 시기였습니다. 대령 진급을 앞두고는 다시 한 번 고민을 했습니다. 목회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께 다시 한 번 기도했습니다.”
전투기 조종을 하지 않더라도 그는 공군 내 요직을 거쳤다. 국방부 외신담당 대변인, 공군본부 정훈과장, 공군사관학교 정훈공보실장 등을 지냈고, 복무 중에는 연세대 정치외교학과 학부와 대학원을 마쳤다. 대령 진급도 목전에 있었지만, 그는 기도응답대로 계룡대에 가장 가까이 있던 침례교신학대학교 신대원에 진학해 군 복무를 겸했다.
신대원을 졸업한 후 목사안수를 받았다. 그는 마침내 예편을 결정하고 동시에 항공작전사령부 예하 대대급 창공군인교회에서 군선교사로 시무하게 됐다. 군 복무를 하면서 안수집사로, 교회학교 교사로 누구보다 군인 교회를 최선을 다해 섬겼기 때문에, 열악한 교회였지만 자신 있었다. 조금만 신경 써도 교회는 장병들로 넘쳐났다.
강단을 잃은 고난의 시기
“군인교회는 목회자로 적응시키기 위한 하나님의 계획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 걱정, 재정 걱정 없이 목회를 하면서 자신 있었습니다. 누구나 좋은 목회자라고 인정해 안이해져 있을 때, 하나님께서 저를 새로운 목회지로 떠나게 하셨습니다.”
군인교회에서 나와 공주 지역에서 교회를 개척했다. 연금을 일시금으로 수령해 5층 건물을 통째로 매입했다. 개척치고는 시작부터 화려했다. 높은 강단을 만들고 좋은 장비를 들였다. 서성철 목사는 자신이 크게 자만했던 때라고 성찰했다.
서 목사는 “어릴 때부터 하나님께서 당연히 제게 복을 주신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며 “감사가 없었다는 것을 나 자신도 몰랐던 시기”라고 이야기했다.
목회를 했지만 군인교회처럼 부흥하지 않았다. 그러다 사람을 믿고 했던 금전거래 결과가 어긋나 교회 건물뿐 아니라 타고 다닐 자동차마저 잃게 됐다. 동시에 주변 중상모략에 휩쓸려 사람들은 그를 곱지 않은 시선으로 고립시켰다. 철저하게 외로워진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견디기 힘든 것은 주일날 설교할 수 있는 강단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얼마나 초라하고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지요. 교회에 대한 갈급함이 있어서 빈 공간만 보면 목회를 이어갈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힘든 시간이었습니다.”
그 때 서 목사가 할 수 있었던 것은 교도소 선교뿐이었다. 차가 없으니 택시를 타고 재소자에게 줄 먹을거리를 싸들고 정기적으로 찾아갔다. 영치금도 넣어주며 상담하고 복음을 전했다. 명예와 자존심, 재산을 다 잃었다. 사람들은 서 목사는 이제 끝났다고 조롱했지만 그는 그렇게 견뎌냈다. 그리고 하나님께 기도만 하던 그에게 뜻하지 않은 길이 열렸다.
끝내 목회를 회복하게 하신 하나님
“아무 것도 없는 제게 하나님께서 공주시내 중심가에 위치한 넓은 대지와 큼직한 건물을 허락해 주셨습니다. 3~4년 후 하나님께서 시험에 통과시켜주셨던 것 같습니다.”
어느 날 서성철 목사는 항상 다니던 길에 있던 건물이 눈에 띄었다. 왜 그때서야 건물이 눈에 들어왔는지 알 수 없다. 교회를 다시 시작하려고 월세라도 알아보려고 했지만 누구도 건물주 정보를 몰랐다. 겨우 주소를 알아내 편지 한통을 간단히 썼다.
“그런데 건물주가 만나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겁니다. 아내와 함께 서울에 찾아갔는데, 대뜸 마태복음 성경구절을 읽어보라고 성경책을 내밀어요.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기 위해 나귀를 구할 때 ‘주가 쓰시겠다 하라’는 구절이에요. 장로님인데 새벽기도에서 이 말씀에 크게 감동을 받았을 때 마침 제 편지가 와 있더라는 겁니다.”
쉽지 않았을 텐데 장로님과 권사님 부부는 약속을 지켰다. 부부가 노후대책을 위해 매입했던 건물이었다. 공주대학교 바로 근처여서 목이 좋았지만, 받은 은혜대로 순종했던 것이다.
그러나 아무것도 없는 서 목사는 리모델링을 할 돈이 없었다. 전기와 수도가 끊기고 손쓸 여력이 없는 상태에서 서 목사에게 부부는 상당한 재정을 들여 새롭게 단장했다.
“어떻게 그렇게 했는지 모릅니다. 지금 생각해도 이해가 되지 않아요. 하나님께서는 100만원도 안 되는 돈으로 좋은 차량도 주셨습니다. 오해가 풀리고 주변 사람들과 관계도 좋아졌습니다. 장로님 부부에게도 하나님께서 더 큰 복을 허락해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생명 다할 때까지 교정 선교할 것”
서성철 목사의 목회는 제2의 전성기를 맞이하고 있다. 지난해에는 예장 백석총회 충남노회에 가입해 새로운 목회 동역자를 얻었다. 국내 최초로 기독교문학 박사과정이 개설된 백석대에서 공부한 것이 계기가 됐다. 올해부터는 아내 장은애 목사도 박사과정에서 같이 공부하고 있다.
지난 연말에는 공주교도소기독교선교회장으로 부름 받았다. 고난과 위기의 순간에도 놓지 않았던 교정 선교를 이제는 선두에서 이끌 수 있게 됐다. 그래서 선교에 대한 그의 각오는 남다르다.
“교정 선교는 시간과 물질, 정성을 다 쏟아야 합니다. 수형자들이 회개하고 하나님의 사랑을 깨닫도록 돕는 사역만큼은 죽는 날까지 하려고 합니다. 무엇보다 목회자로서 본이 되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한 목표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