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디언의 민화다. 한 소년이 산에서 독수리 알 하나를 주워서 암탉 둥지에 넣어 놓았고 얼마 후 암탉은 독수리 알을 품어 부화시켰다. 새끼 독수리는 병아리들과 함께 지냈다. 독수리는 병아리와 달리 큰 몸집과 날카로운 발톱과 강한 날개가 있었다. 그런데 그것을 사용할 줄을 몰랐다. 한번은 들쥐 떼가 닭장을 습격했다. 닭들은 몸집이 큰 독수리가 들쥐들을 쫓아줄 것으로 기대했다. 그러나 독수리는 같이 도망만 다녔다. 어느 날, 닭장 밖에서 큰 독수리 한 마리가 멋지게 하늘을 날고 있었다. 닭장의 독수리는 그 모습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 정말 멋있는 새다. 나도 저런 새가 되면 얼마나 좋을까”
이 이야기는 독수리 같은 자신의 정체성과 능력을 알지 못하고 닭장에 갇혀 사는 사람을 향해 주는 교훈이다.
독수리는 그냥 새가 아니다. 독수리는 어느 장소에서 살든지 새들의 왕이다. 우리는 그냥 인생이 아니다. 하나님의 사람이다. 우리의 정체는 목회자요, 성도다. 어디에서 살든지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다.
우리의 진짜 모습을 회복해야 한다. 그 정체성을 회복해야 한다. 왜 독수리로 태어나서 닭처럼 사는가? 여러 번 무너짐을 반복하다가 그 상황에 갇혀 있고 그냥 그것에 익숙해져서 불편함도 느끼지 못하고 비전과 소망을 위한 날갯짓조차 접은 것은 아닌지? 이제 다시 비상을 시도해 보자. 부활의 생명과 능력이 그 날아오름의 바람을 일으키고 있다.
어떤 아픔이 있어도 실패가 있어도 우리는 여전히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의 이름으로 이길 수 있는 존재다. 나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다시 부활하신 그 은혜를 기억하고 당당해져라. 이것이 영적 자존심이다. 부러우면 지는 것이다. 세상을 부러워하지 말라. 오히려 세상이 우리를 부러워해야 하는 존재다.
초대교회 성도들이 그랬다. 모든 것에서 세상적인 조건이 밀렸지만 오직 하나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세상을 뒤집을 사람으로 살았던 것이다. 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니까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이 모습이 바로 우리의 모습이다.
부활하신 예수님이 제자들을 만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라” (눅 24:48). 3년 동안 제자의 삶을 살지도 못했고 마지막에는 예수님을 떠났던 그들이 결국에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후에는 다시 제자의 모습으로 돌아간다. 사람을 낚는 어부, 원래의 제자로서의 모습이 된 것이다. 이것이 부활의 능력이다. 우리도 다시 그 자리로 가야 한다.
빅토르 위고(Victor Hugo, 1802~1885, 프랑스)는 이렇게 말했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진정으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가장 두려운 일이다.”
“죽는 것이 두려운 것이 아니다. 한 번도 진정한 목사로, 성도로 살아 본 적이 없었다는 것이 두려운 일이다.” 이제 다시 그 부르심의 자리로 가서 부활을 믿는 사람답게 한 번 독수리로 살아보자.
임병재 목사 / 엘드림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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