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없는 세례?
믿고 세례를 받는 자는 구원을 받을 것이요, 그렇지 않으면 정죄를 받는다는 말을 유아에게 적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츠빙글리는 본문의 맥락을 보면,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한 후에 나오는 말씀이기에, 유아들이 설교를 이해할 수도 받을 수도 없다면, 그 대상은 설교를 듣고, 믿든지 거부하든지 하는 어른이라는 것이다.
물에 들어가 세례를 받기 전, 공적으로 믿음을 고백하면, 훨씬 힘 있고 강력한 효과를 보게 된다는 그들의 말에 대해, 츠빙글리는 그런 경우 역시 유아들에게는 해당하지 않는다고 답한다. 물론 아이의 부모가 세례받은 신앙인일 경우, 신앙 없는 부모보다는 유아교육에 많은 유익이 있다. 그런 맥락에서 과거 할례처럼 유아세례는 역시 하나의 성례로서 유아가 주님의 규례를 배우고, 삶을 고상하게 하고, 부모에게 그러한 교육을 책임지게 하려는 것이다. 크리스천 부모로부터 출생한 아이는 정결한 삶을 살아야 하고, 아브라함의 후손들이 할례를 통해 영과 육이 구별된 자가 된다. 그런데 유아들이 자력으로 믿음을 고백하지 않는다고 이의를 제기한다면, 성찬에서 바른 신앙고백을 하게 하면 된다는 것이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음을 통해 생명을 얻은 자의 기쁜 감사 고백이고,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들의 가장 깊은 속사람의 일치를 기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도 한 사람, 그리고 모든 성도가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내면의 하나 됨을 함께 감사하고 기뻐하는 성도의 교제가 성찬이기 때문이다. 성찬에서 함께 한 성도들이 떼는 빵은 이음의 수단이고, 일치의 상징이다. 유아세례에서 사용하는 물 그 자체가 영혼을 정결하게 한다고 믿어서는 안 되고,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만이 정결케 된다.
평화주의자 츠빙글리
잊지 않고 츠빙글리는 덧붙여 말하기를, 유아세례를 향한 외적 표식 때문에 서로 격한 논쟁을 벌이고 싸우는 것은 전혀 무의미하다고 결론을 내린다. 이러한 싸움은 결국 자존심, 자기애, 명예욕, 분열을 부추기는 사탄의 꼼수라고 본다. 츠빙글리는 긍휼의 하나님께서 악한 싸움에서 건져내어 각자에게 안식과 평화의 영을 가득히 부어주길 기원한다. 츠빙글리는 당시 거대한 논쟁점이 되었던 유아세례에 대해 철저하게 성경에 근거한 진리 추구와 진리 확증은 사양하지 않으면서도 언제나 주의 사랑을 잃지 않으려는 평화주의자의 모습을 가지려 노력했음을 본다. 어쨌든 유아세례를 위한 츠빙글리의 성경적 논리가 후대의 동의를 얻기에 부족함이 없다 하겠다.
취리히의 종교개혁자 츠빙글리가 스트라스부르에 있는 형제들에게 한 편의 논문 같은 장문의 편지를 쓴 것은 유아세례에 관한 성경적 이해를 분명히 제시하려는 것으로, 성경적 이해를 분명히 할 때, 무엇보다 불필요한 싸움이 사라지기를 원했다. 어려운 전환의 시대 선한 목적을 향해 하나님의 일을 함께 가려는 의도가 강했다 하겠는데, 동역의 중요성을 알았던 츠빙글리에게 유아세례는 사실 본질적(fundamental) 교리가 아니고, 관용할 수 있는 비본질적(non-fundamental) 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