츠빙글리의 편지들 람베르트와 형제들에게, 1524년(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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츠빙글리의 편지들 람베르트와 형제들에게, 1524년(3)
  • 주도홍 교수
  • 승인 2020.10.20 15: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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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도홍 교수의 츠빙글리 팩트 종교개혁사-111

미래 신앙을 향한 유아세례
츠빙글리는 확신 있게 말하는데, 세례 요한은 본인 뒤에 당연히 오시는 그리스도를 세례받는 그들 모두에게 분명히 알리기 위해 세례를 베풀었다는 것이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온 세상에 메시아를 알리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례받는 그들에게 메시아를 통해 죄를 인식하도록 하기 위했음을 분명히 한다. 요한은 이스라엘 자기 백성에게 오실 메시아를 선포하기 위해 세례를 베풀어야만 했는데, 하나님의 은혜라 할 것이다. 게다가 츠빙글리는 사도행전 19:4~5를 가져오는데, “바울이 이르되, 요한이 회개의 세례를 베풀며 백성에게 말하되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믿으라, 하였으니, 이는 곧 예수라 하거늘, 그들이 듣고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으니.”라는 말씀이다. 꼭 오셔야만 하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요한이 세례를 베풀었다는 사실을 츠빙글리는 제시한다. 그러면서 누구도 세례 요한이 오실 그리스도를 선포하며 베푸는 세례를 불편하게 여기거나, 그 메시지를 이해하지 못하거나,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츠빙글리는 분명히 한다. 

세례 요한은 자신이 얼마나 초라하고, 자격이 없고, 그리스도의 신 들메도 들 수 없는 자임을 숨기지 않았지만, 요한이 사람들에게 세례를 베풀었던 것은 그들이 계속해서 오실 메시아를 믿고 전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까닭에 츠빙글리는 요한의 세례와 그리스도의 세례는 차이가 없는 동일한 성례로 본다. 정리하면, 죽음을 이기신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정확하게 알고 난 후 받는 세례와 그리스도의 부활이 아직 이뤄지지 않은 상태에서 오실 그리스도를 바라며 받는 세례라는 것이다. 세례는 부활의 복사인데, 세례를 통하여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후에 언젠가 믿음으로 마땅히 다시 살기 위해, 그리스도를 알기 위한 목적으로 세례를 받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유아세례는 미래 믿음을 향해 베푸는 것이라 할 수 있는데, 이를 위해 츠빙글리가 가져오는 성경은 로마서 4:11로 8일 된 아이에게 할례를 베푸는 것은 그가 수년 후에 비로소 믿음으로 나올 것을 알기에, “할례는 믿음의 징표”라는 말씀이다. 이처럼 유아세례는 할례와 같은 위치여서, 어디서, 누가, 언제, 어떻게 유아세례를 베푸느냐는 전혀 본질이 아니라는 것이다. 세례가 크리스천의 할례라는 말은 다른 설명을 보태지 않더라도 명약관화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츠빙글리는 골로새서 2:11 “그 안에서 너희가 손으로 하지 아니한 할례를 받았으니, 곧 육의 몸을 벗는 것이요, 그리스도의 할례니라”를 인용한다. 세례는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지낸 바 된 크리스천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이처럼 오직 하나님 말씀의 능력으로부터 이뤄지는 크리스천의 할례는 아브라함의 할례와 같다. 그리스도는 사도들에게 아이들이 본인에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고 하셨는데, 하나님의 나라가 그런 자들의 것이기에, 주님은 그들을 품에 안고 축복하셨다. 그렇지만 어떤 자들은 주님은 아이에게 성부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지 않았기에, 결국 그는 본인에게 아이들이 오는 것을 금했기에, 유아세례를 베풀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츠빙글리는, 그리스도는 누구에게도 세례를 베풀지 않았다고 반론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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